
지난달 30일 범여4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한 법안은 당초 선거법·공수처법·검경수사권 조정법안 등 3개법안이었다. 그러다 사보임 태풍 속에 이 합의안 세가지에, 공수처법안에 기소심의위원회 설치를 넣은 소위 '권은희 법안'이 추가돼 모두 4개 법안이 패스트트랙 열차에 올랐다.
당초 합의에서 배제된, 더 정확히는 연동형비례제를 담은 선거법을 극력 반대해온 한국당을 빼고 합의하자 극력 반발하며 국회가 마비되다시피했던 이번 사태는 결국 범여 4당의 심야 기습 의결처리로 마무리됐다.
그 과정에서 범여와 한국당간 감정의 골은 패일대로 패였다. 고성과 막말, 몸싸움에 빠루와 망치까지, 그야말로 동물국회로 막장드라마를 연출했었다. 30여년만의 경호권 발동과 사상 최대 고소고발전도 보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향후 정국 내내 출몰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격전이 끝나자 진영간, 정파간 논평전으로 대체되면서 상호 잃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면서 득실에 관심이 모아진다. 패스트랙에 태워진 법안들이 향후 최장 330일 후에 나타날 수혜를 떠나 범여권으로서는 승전고를 울리며, 자화자찬 내지는 승리의 기쁨을 살짝 감춘 채 표정관리하는 모습도 읽혀진다.
반면, 법안의결을 막아내지는 못했으나 나름 헌법적 가치를 목청높여 외치면서 숨어있던 투쟁심과 적개심을 끌어내고 진영의 결집 효과를 거뒀으니 한국당으로서도 완전 패배한 것은 아니란 분석도 가능하다.
우선 한국당은 선거제와 개혁법안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보수진영에서조차 그런 평가가 나온다. 과거 '웰빙 정당'의 대명사에서 '투사'정당으로 바뀐 것이다. 정권을 내주기 훨씬 이전부터 패인 계파갈등은 좀처럼 찾기 어려우리만큼 단일대오를 형성했으며, 제1야당으로서 대여 투쟁의 야성(野性)이 십분 발휘된 측면이 있다.
국회 본관 정개특위 회의장 앞에서 한국당 의원들이 스크럼을 짠 채 바닥에 드러눕고, 팡을 휘두르며 '독재 타도', '헌법 수호'를 외친 모습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또 한국당은 2일 항의의 표시로 일부 의원들의 삭발식에 이어 대구 대전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본격적인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이 통과되면 국회는 좌파가 점령하게 된다는 것을 민심의 현장에서 알리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등 범여4당은 국회복귀를 거듭 촉구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한국당이 내세운 '좌파 독재'다. 한국당은 입만 열면 '좌파독재'를 외친다. 의원총회장 현수막이든 농성장 피켓이든 도배를 한다. 촛불정권으로 출범한, 어찌보면 포스트 민주화 이후 또아리를 틀고 있던 한국사회의 적폐와 민낯들에 항거한 촛불 덕을 가장 많이 보면서 손쉽게 정권을 '넘겨 받다시피 한' 문재인 정권도 독재의 길로 가는것인가? 의아해 하는 국민들이 많을 것같다.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왠 독재냐 하는 이들도 많을 것같다.
'독재'란 말만 들어도 경끼(驚氣)하던 시절도 있었다. 서슬퍼런 군부 총칼과 군화발에 채이고 찔려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과거 이승만 독재니, 군부 독재니 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김일성 독재나 공산독재체제 소리만 들어도 섬뜩한 것이 그렇다.
독재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을 뛰어 넘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의회제민주주의 ·권력분립제 등 민주적 체제를 갖지 않고 한 개인 또는 그를 둘러싼 소수자를 정점으로 하는 집권적 전제정치, 헌법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의하지 않은 정치체제를 말한다. 민주적 헌법의 존재와는 관계없다.
가장 무서운 것은,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카리스마적 기대를 받는 지도자가 사회의 근본적 개혁과 끊임없는 외침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내걸고 권력을 집중할 때 나타나는 독재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 독일의 나치스 독재, 일본의 군국주의 독재,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북한의 김일성 독재 등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이들은 한결같이 권력이 적절히 분산돼있지 않는다는 특징이다. 가장 큰 문제는, 권력 분산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반해, 지도자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로 독재가 장기화, 혹은 미화된다는데 있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평소에도 급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조근조근 설명하는 타입이다. 패스트트랙 지정후 사실상 '패전' 후 첫 의총 자리서 그는 '문재인 좌파 독재'라 하여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 국민들이 ‘독재’라는 말을 최근에 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과연 그런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신 분들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재’라고 하는 것은 뭐겠나.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독재다. 한 두 번 한 것이야 그렇게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어서 굳어지면 이제는 독재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문 정부 독재’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좌파독재다."
그의 표현을 빌 때, 핵심되는 부분은 첫째는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어야 하고, 두번째는 그것이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어서 굳어진 상태라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정문앞에 내걸린, '문 정권 경제파탄 독재연장 막아내자'는 현수막을 보건대, 한국당으로서는 문재인 정권이 이미 독재의 길로 한참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그 현수막 위에 더불어민주당은 '독재의 후예가 독재 뜻을 모르십니까?'라고 되받아치는 현수막을 걸었다.
'독재'의 의미를 두고서도 진영간 갈리는 식이다. 국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나 문맹인 쯤으로 알고 하는 논쟁이 아니었으면 싶다. 국민 무서운 줄을 알고서나 하는 싸움인지 모르겠다. 지금이 무슨 고무신 선거를 하는 때도 아닌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