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헤럴드=서울 강재규 기자] 39년 해묵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네탓공방'이 뜨겁다.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진영간 논쟁이 격화조짐을 보이는 것과 관련해 당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기록물들이 국민 앞에 모두 공개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의 발단은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이 최근 언론을 통해 "정작 그의 증언 때문에 사형 언도까지 받았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가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 때문인 것처럼 묘사하면서부터.
여기서 '그'는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을 지칭한다.
윤 총장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나 언제든 허물을 반성하고 고칠 수 있기에,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며 컸다"며 "하지만 40년이 되도록 인간다운 길을 마다하시는 군요"라며 심 의원에 대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사형선고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지목했다.
이에 대해 심 의원은 12일 "김대중씨 사형선고는 국내시위가 아닌 한민통 의장 때문, 즉 가족과 측근들 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반박한다.
진실공방과 함께, 인기리에 방영됐던 MBC 41부작 '제5공화국'을 다시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와 관련, 심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윤 총장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자료에서 "진보진영이 2012년 유네스코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했으면서도 자료가 없어서 진실이 파악이 안 된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국가기관 등 3곳 이상에 보관되어 있음에도 신군부가 은폐목적으로 삭제했다는 김홍걸 씨의 어이없는 주장을 이어받아 민주당은 공판기록이 없어 본 의원이 허위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거짓말 릴레이를 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내밀히 들여다 보면, 지금 벌어지는 이 논쟁은 심 의원과 유시민 전 의원, 즉 진영간 대결구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 같은 학번으로서, 본래는 같이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한 형제처럼 가까웠던 둘 사이. 그리고 윤 총장은 그 한 학번 아래로 이들을 형처럼 지냈다.
지금은 여야로 갈려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번 논쟁은 39년전 1980년 '서울의 봄'때, 한국당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누가 수사기관에 동지를 불었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인 셈이다.
유시민 측 윤호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 한국당 심재철 의원 때문"
심재철 "김대중씨 사형선고는 국내시위가 아닌 한민통 의장 때문"
당시, 심 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 이사장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신분이었다.
그간 이와 관련한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유 이사장은 방송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끌려가 조사받을 때 맞지 않기 위해 진술서를 하루 100장씩 썼는데,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밀조직 등 핵심 정보는 끝까지 감췄다고 했다. 일종의 자기과시인 셈.
그러나 이에 대해 심 의원이 바로 맞받았다.
심 의원이 "거짓말"이라며 유 이사장의 당시 진술서를 공개했다. 유 이사장 진술서에는 김부겸 신계륜 등 당시 하가생운동가 77명의 이름과 행적이 등장했다.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 돌던 이해찬'이란 표현도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심 의원은 "수사 당국에 상세한 지도를 준 셈"이라고 공세를 폈다. 또한 자신도 이 진술서 때문에 사법처리됐는데, 유 이사장은 불기소 석방됐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 이사장은 "비밀조직을 감추기 위해 학생회 등 공개조직을 내세워 허위진술한 것이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심의원이 자수한 뒤 당국이 요구하느느 진술을 해줬다고 역공을 편 것. 더 나아가 "나는 그의 진술서를 보고 맞춰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심 의원은 다시 자기 진술서까지 공개하고 "나는 고문과 협박 속에 유시민 이름은 한 번 거명했다. 유시민은 내 이름을 78번 거론했다. 국민께서 판단하시리라"고 했다.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200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락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독재자들에 의해 일생에 5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겻고, 6년간의 옥살이와 40여년간의 연금과 망명, 감시를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1980년 군사정권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릴 때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사형수 김대중이 수감돼있던 남한산성 육군 형무소로 면회갔던 부인 이희호 여사와 나눈 대화가 일화로 전해진다.
"여지껏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당신에게 북괴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야비한 정치공작"이라는 것.
그러자 김대중은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들과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난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심 의원은 반박 자료에서,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혐의에 대해 크게 3가지 부분으로 설명한다.
《친북성향 인사들과 반국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하고 그 리더(의장)가 되어 국가안전을 위협했다는 것과 10.26사태 이후 신민당에 복귀해 당권장악이 곤란해지자 국민연합 등 사조직을 통해 학생시위를 이용해 집권하겠다는 것과 전남대 복학생 정○년에게 시위자금을 제공해 5·18광주시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김대중 前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은 1978년에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확정된 한민통의장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곧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1심 판결문 법령의 적용을 보면 “동법 제38조 제1항 제1호에 의하여 형이 가장 중한 판시 국가보안법 위반제에 정한 형으로 피고인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고”라 기재되어 있고 김대중씨 역시 1심 최후 진술에서 한민통을 ‘내 목숨을 앗아간 문제’라고 진술했다(1심 19차 최후진술, 000337쪽).
내란음모는 법정 최고형이 사형도 무기징역도 아닌 유기징역(20년 이하)일 따름이다. 그러나 사건 이름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붙여져 일본 한민통에 의한 반국가단체 활동 부분은 명칭에서 빠져있어 대다수 사람들이 국내 시위에 의한 내란음모 때문으로만 착각하기 쉽다.
본 의원의 공소사실은 학생시위에 관한 것이었고 김대중씨 공소장이나 증거목록에도 언급조차 없으며 김대중 씨와 본 의원은 증거목록 범례와 판결문 법령의 적용이 아예 다르다. 곧, 본 의원과 김대중씨 사형선고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데도 집권여당 사무총장이 나서서 "정작 그의 증언 때문에 사형 언도까지 받았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며 억지주장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검찰은 기소이유를 “김대중이 북한의 사주를 받는 조총련계 불순세력의 지원으로 1973년 한민통을 결성해 의장이 되었고, 1978년 한민통이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 봄까지 긴밀하게 접속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라고 적시했다.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수괴혐의는 법정형이 사형밖에 없어서 유죄로 인정되면 무조건 사형이기 때문에 김대중씨는 경찰·검찰 수사 초기에는 한민통과의 관계를 적극 부인했지만 5월 29일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친북한 성향인줄 알면서 한민통을 결성한 사실을 인정했다(피의자신문조서 1회, 1980.5.29. 001764~001777쪽). 여기에다 이같은 김대중씨의 한민통 혐의, 곧 사형선고의 근거인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를 입증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김대중씨의 부인 이희호씨와 측근인 김○현, 김○영, 이○돈 피고인 등이었다.
이희호씨는 검찰이 증인으로 청구해 공판 전 법무사가 작성한 증인신문조서를 통해 78년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된 한민통 기사와 미군철수를 주장한 한민통 기사를 남편 김대중씨에게 전달했고, 그 이후에도 김대중씨가 1980년 3월까지 지속적으로 한민통 관계자들과 매월 2~3차례 긴밀하게 접촉했음을 증언했는데 이것이 결정적 유죄의 증거가 되어 1심, 2심, 대법원 판결문에 그대로 증거의 요지로 인용되었다.
“△이희호: (김종충씨는) 남편이 일본을 방문 할 때마다 뒷바라지를 하여주고 1973.8경 남편이 납치귀국 후에는 동년 10월 하순부터 매월 2-3회씩 전화 연락이 있었으며 안부 등을 물었습니다.”(법무사 작성의 이희호 증인심문조서 00769쪽)
이희호씨는 김대중씨가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판결났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2년여 반국가단체와 긴밀히 접촉했다는 사실도 증언했다.
“△이희호: 1978.6 경 본인의 집에서 조간신문에 한민통 일본본부가 반국가단체로 대법원에서 판시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으며 간첩사건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입원하고 있던 서울대학병원 201실에서 남편에게 위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희호: 1980.3. 중순 오후 2시경에 일본 시사통신기자 나가누마가 본인 집을 방문하여 남편과 대화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중략)···나가누마는 일본에 있는 김종충의 부탁으로 왔다고 하면서 한민통 일본 본부에서는 지난 1978.6 경 대법원에서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판시하였기 때문에 남편의 정치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다음 한민통의장단 개편 시에는 김재화를 한민통의장으로 추대해야겠다는 말을 하였고 남편은 그렇게 하여달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됩니다.”(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이희호 증인신문기록 000771~000774쪽)
김대중씨의 한민통 혐의를 입증하는 증언은 이희호씨 뿐만 아니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인 김○현 前국회의원과 당시 통일민주당 당수대리인 김○영 국회의원, 이○돈 국회의원으로부터도 나왔다. 이들은 검찰의 증인신문이나 법정 진술을 통해 김대중씨가 한민통의장직을 계속하는 등을 증언했다.
“△법무사: 증인은 김대중이 한민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김○현: 1979.9. 하순경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당시 주일특파원으로 재직했던 허윤도기자를 만나 그로부터 한민통은 반국가 단체로 배후에서 조총련이 조종하고 있으며 통일문제도 선통일 후민주를 주장하고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반한 단체가 분명한데 김대중씨가 그 한민통의장으로 되어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80.2 말경 동교동 김대중씨 집을 방문하여 동인에게 한민통이 법원 판결로 반한 단체로 규정된 이상 그 의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김대중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동인이 한민통의장직을 사임하였는지 여부는 아는 바 없습니다.“(법무사 작성의 김○현 증인신문조서 000740~00741쪽)
“△검찰: 피고인은 1975.7 중순경 심장병 치료차 일본에 갈 때 김대중 집으로 찾아가서 부탁할 일이 없느냐고 했드니 일본에 가면 한민통 회원인 김종충을 만나서 나를 위해 김대중구출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반공법 긴급조치 등 법률이 있기 때문에 한민통의장이라고 떠들어대면 국내에 있는 나의 입장이 곤란해지니 의장직에서 사퇴시켜 달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본에 가서 김종충을 만나 그 뜻을 전한 일이 있고, 치료가 끝난 다음 숙소인 힐튼호텔 앞 대왕반점에서 다시 김종충과 만나 이야기 중에 지금 현재 김대중이 한민통의장이 아니라고 발표하면 김대중 구출위원회와 한민통이 침체 상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문제는 나에게 맡겨달라고 전해달라고 하면서 우황청심환 30알을 싸주면서 김대중에게 전해달라고 해서 국내로 돌아와서 김대중에게 김종충 말과 약을 전해준 일 있나요.
△김○영: 예. 있습니다.“(김○영 1심 11차 공판조서 002157~002160쪽)
“△검찰: 김대중 피고인이 한민통 의장이 된 것을 언제 알았나요.
△이○돈: 김대중 귀국 직후 정가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이였고 의장직을 수락했는지는 모르나 저쪽에서 추대를 했다고 김대중 본인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인물이라 그런가보다 했었습니다.“(이○돈 1심 11차 공판조서 002141쪽)
“△검찰: 곽동의는 어떤 인물로 알고 있나요.
△이○돈: 조총련계의 앞장이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요인 포섭이 그들의 주된 임무로 알고 있습니다.
△검찰: 그러한 것을 어떻게 알았나요.
△이○돈: 신민당 국회의원이 늘 듣는 이야기이며 정치인의 상식입니다. 배동호, 곽동의를 만나지 말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검찰: 일본에 가면 우리나라 대사관 직원이 금기사항 1호로 배동호, 곽동의는 조총련계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해주나요.
△이○돈: 그렇습니다. 저는 일본 갈 때 공항에 내리니까 대사관 직원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검찰: 피고인이 최초 일본에 간 것이 언제인가요.
△이○돈: 71년도인데 그때를 비롯하여 일본에 갈 때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검찰: 다른 신민당 국회의원들도 곽동의 배동호가 조총련 앞잡이인 것을 일본에 가기 전에 다 알고 있었나요.
△이○돈: 네.“(이○돈 1심 11차 공판조서 002135~002137쪽)
또한 김대중씨의 공보비서 한○갑씨와 섭외담당 비서 김○두씨도 증인심문조서와 참고인진술조서를 통해 김대중씨가 1980년 3월까지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의 국제국장 김종충과 지속적인 접촉을 했음을 증언했다.
“‘△한○갑: 1976.3 중순경 일본에 있는 김종충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바꿔달라고 하여 바꿔준 사실이 있다.“(법무사 작성의 한○갑 증인신문조서 000759쪽)
“△검찰관: 진술인은 일본에서 김종충한테서 김대중에게 오는 전화를 바꿔준 사실이 있지요.
△김○두: 있습니다.
△검찰관: 언제쯤 부터인가요?
△김○두: 본인이 일본에서 오는 전화를 받은 것은 1976년 초부터입니다.
△검찰관: 진술인이 김종충을 어떻게 아나요?
△김○두: 외국에서 오는 전화이므로 그대로 바꿔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떨 때는 자신이 김종충이라고 밝히기 때문에 본인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검찰관 작성의 김○두 참고인 진술조서 1193쪽. 1980.8.9.)
이처럼 김대중 씨와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 김대중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입증한 결과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수괴에게 적용되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던 것이다.》
격화하는 '네탓 공방'. 과연 이념과 진영의 논리가 아닌, 진실의 실체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