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열린 고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행사장 맨 앞줄에 당연히 모습을 드러냈을 법한 인물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다. 그러나 그는 도지사 재임시절 불거진 성스캔들로 법정에 마저 서야 할 처지다.
직함이 없던 안희정. 하지만 그는 노무현을 위해 옥고를 치렀고, 그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한 때는 '우 광재, 좌 희정' 소리가 공공연했다. 그런 안희정에게 국정원장이 보고하고 간다할 정도라 하여 '궐밖 정승'으로 불리웠던 안희정이 불려나온 건 왜일까?
'文의 남자'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최근 정치적 중립의무를 지고 대북 문제를 포함한 국가 정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한정식집 '밀담'을 나눈 사실이 정치권의 뜨거운 논란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27일 해당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알려진 양 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모 한정식집에서 철저한 경호 속에 4시간 이상 '비밀 회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만으로도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논란이 되자 양 원장은 27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백브리핑을 통해 "독대가 아니라 지인들하고 일행들과 만나는 식사자리였고, 다른 일행이 있어 긴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성격의 자리는 아니었다"고 해명한 뒤, 이런 자리가 적절했느냐는 기자들의 추가질문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은 이에 대해 국회 정보위를 열어 국정원장으로부터 사실관계를 보고받아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공식논평에서 "정권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 민주연구원은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라고 말하며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민주연구원장에 취임했던 사람"이라면서 "이번 만남을 위해 양 원장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민주연구원의 공식 행사도 불참했다고 한다. 가히 총선만 바라보는 문재인 정권다운 행보다"라고 강도높게 비난한다.
이와 관련해서도 정작 양 원장은 "야당의... 자리까지 어떻게 제가 일일이 (관여하겠느냐)..."며 답변을 회피했다.
양 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비공개 만남은 야인생활을 하던 양 원장이 2년 만에 여의도 정치권으로 복귀한 지 꼭 일주일 만의 일인데다, 더불어민주당의 씽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내년 총선을 위한 올인 활동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더욱 관심이 모아진다.
특히 양 원장은 이 일이 있기 닷새 전인 지난 16일 문희상 국회의장을 독대, 청와대와 국회 뺏지만 안달았지 '궐밖 정승' 이상의 광폭 행보를 이어가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양 원장은 당일 오후 6시 20분께부터 10시 45분께까지 4시간 이상 서울 강남구 모처의 한정식 식당에서 독대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국회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개최한 '사회적 경제, 문재인 정부 2년 평가와 과제' 주제 토론회를 뒤로 하고 서둘러 오후 5시 30분께 홀로 국회를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그는 자동차가 아닌 지하철을 이용했다.
두 사람은 4시간가량 술을 곁들인 비밀 회동을 했고, 식당 입구로 나와서도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사인(私人)간이었다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사안이다.
하지만 국가 정보를 책임지는 국정원의 수장과 정당 싱크탱크 수장이 비공개 회동을 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고, 특히 내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의 총선 전략, 정책 수립 등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친문 핵심 인사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정원장을 단독으로 만나 4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정치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양 원장은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핵심 역할을 한 여권 핵심 인사다. 양 원장은 지난 2016년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표가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세울 때, 2016년 총선 당시 표창원, 김병기, 조응천 등 '문재인 키즈'로 불리는 인사 20여 명을 영입하는 등, 19대 대선 실무팀인 '광흥창팀'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2017년 대선에서 민주당 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부실장을 맡아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하며 문 대통령의 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문의 측근 3인방,곧 '3철'(양정철, 전해철, 이호철)의 핵심멤버로 불리워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양 원장이 문 대통령 당선 후 2년여 동안의 야인생활을 마치고 최근 여의도 정치권으로 복귀하며 광폭행보를 하는 이유는 어디있을까.
양 원장은 정치권 복귀 배경에 대해 "정권교체의 완성은 총선 승리라고 생각한다"며 "문 대통령 임기 동안 완전히 야인으로 있으려 했으나, 뭐라도 좀 보탬이 돼야할 것 같아서 어려운 자리를 감당하기로 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국정원장이란 자리는 또 어떠한가. 국가정보를 총괄하는 엄중한 자리임은 다 아는 사실. 그 자리는 청와대와 함께 공식 보고라인에 있는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도 독대가 쉽지 않은 인사다. 이혜훈 국회 정보위원장 "지난 6개월간 서 국정원장을 독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 때문에 "이 사안은 분명 문제가 있다. 국정원 공식 보고라인에 있지 않고, 정부에서 일하지 않는 대통령 최측근이 대북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고 민감한 시점에 정보기관장을 만나 대체 무슨 얘길 했는지 의문이다"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끊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국정원의 국내 정보수집을 폐지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밀며 탈정치화를 완성했다고 하는 것을 곧이듣기 어렵게 하는 대목일 수도 있다.
한편에서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저녁시간에 정치권의 누구와 지극히 사적으로 자리하는 것까지 막을 수 있나하고 할 수도 있으나 국정원장의 자리가 통상 근무시간을 넘겼다고 해서 지극히 사인으로 돌아가는 그런 자리는 아니다. 24시간 국가정보의 수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위치임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는 충분하다.
가뜩이나 그간 북미, 남북 대화가 수차례 진행되면서 해결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였던 북핵문제 해법이 지난 2월 '트럼프-김정은 노딜' 이래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문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고 보면 불과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내년 총선에 특단의 카드를 내놔야 할 입장에서 뭔가 '노림수'를 협의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대북 정보 수장인 국정원장과의 독대라면, 또 하나의 '북풍'이 준비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해볼 법하다.
총선이라고 하는 큰 선거는 원래 '바람'이 아니고서는 이기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박근혜 정부때 국정원장 전원이 특활비 상납과 정치 개입 등으로 조사받고 처벌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