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 사법부의 강제징용 판결에 불만을 품고 한국의 급소를 공격, 반도체 산업에 대한 규제를 시행한지 닷새째다. 일본의 이번 보복조치는 자유무역정신에 역행하는 비정상적 조치로 마땅히 철회돼야 한다. 예상된 일이었고 많은 경고들이 있었음에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부 역할을 제대로 못 한 우리 정부의 ‘뒷북’ 대응이 답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잘잘못을 들추기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다. 시민단체들도 나서기 시작한 모양새다. "일본 여행도 가지 말고 일본 제품을 사지도 말자"며 불매운동에 나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응은 우리 국민들의 순수한 애국심과 감정적 대응이 뒤섞이면서 자칫 불필요한 확전으로 치닫을 공산이 적지않아 우려스러운것도 사실이다. 우리 정부도 드디어 청와대 정책실이 국내 5대 기업들과 만나 협의를 하거나 수일 내 대통령과 회동하며 경제계 대응책을 협의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는 이번 무역보복조치가 비롯된 원인과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부터 해야한다. 우선 이번 무역보복조치는 반덤핑관세 같은 일반적 '수입규제'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제 징용자 배상판결에 대한 일본의 지극히 감정적, 정치적 대응이 원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로 인한 결과는 당연히 급소를 타격당한 우리의 피해가 즉효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산업의 취약점을 노린 핵심 소재부품의 '수출규제'가 장기화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대한민국 경제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피해를 입히며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이고, 한일간에 사실상의 국교수립을 위한 협정이라 할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체결 이래 누적적자만도 700조원을 초과할 만큼 대표적인 만성적자라 해도 상대적으로 우리측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경제력이 좀더 작은 나라를 상대로 무역보복을 취한 일본의 행태는 치졸하기 이를데없다. 역사적으로나 인도주의적으로나,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가 대응을 해야 할 상대는 이제까지의 국내정치 하듯 이념을 앞세우며 권력을 휘두르듯 해서 풀릴 사안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상대는 세계 1, 2, 3위를 다투는 소위 경제대국이라 칭하고, 펀다멘탈이 더 탄탄한 나라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품목들이 자동차 등 소비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산 원자재나 고급 기술력을 요하는 장비 등인 반면,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 전자제품 외에도 농수산물 등 소비재류가 많은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일본측이 먹을 것 좀 못먹는다해서 당장에 전반적인 산업과 경제에 타격을 입을 것같지는 않다. 반면에 우리는 다르다. 반도체 생산에서 이번에 일본의 수출규제 품목은 결정적인 소재들이다. 반도체는 우리에게 그야 말로 산업의 '쌀'과 같은 존재다. 그야말로 우리 경제에 급소를 공격당한 셈이다. 자칫 감정적인 대응으로 국익을 훼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지난해 우리 법원의 일제하 징용배상 판결은 다분히 현 문재인 정권의 이념적 승리를 안긴 측면이 있다. 그걸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했거나 지지층 결집에 이용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법적 적폐 척결이란 이름아래 진영논리가 우세한 판결에 환호했던 것이 그것이다. 당시 일본에 대해 우리 청와대는 한편에서는 법원의 판단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스탠스를 보이면서도 단호한 입장을 보인 것을 우리는 안다. 일제하 강제징용피해자 단체 등 반일 민간단체에 힘을 실어주거나 이들을 도리어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일청구권협정과 별개의 사안으로 출발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같은 사법적 판단 하나가 한일 관계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는 없는 일이다. 54년 해묵은 한일 청구권의 문제는 일거에 해소될 성질이라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한일간에 풀어나가야 할 문제였다. 한일관계에 과거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도 동시에 논의돼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발끈한 이유도 바로 그때문임은 불문가지다. 일본이 어쩌면 이번에 한국측 민간단체를 타겟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우리 청와대 내지는 정부를 타겟으로 삼고 경제계를 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경제계 곧 해당 대기업들은 엉뚱한 피해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기류는 이미 우리 기업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대응책을 마련한답시고 대기업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청와대와의 대응회의를 준비한다고 할 때 정작 기업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 그 증거다. 아무 죄없는 기업들이 볼매맞은 상황을 연출한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접 나서 일본과 대화를 통해 갈등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내심 청와대가 나서는 것이 불편하다는 얘기다.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반일감정을 부추기거나 보복조치를 운운하는 등 감정적 대응이 아닌 철저한 실리 외교로, 힘들게 일구어 온 대한민국 ‘산업화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현실을 모르는 한심한 대책으로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뒷북대응으로 내놓은 것이 고작 WTO 제소 검토라지만, WTO 제소에 큰소리칠 일도 아니다. 승소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관련 산업이 붕괴한 후에 WTO 소송에서 이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함이다. 수입선 다변화나 부품 국산화 같은 현실성 없는 대책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들에겐 속모르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일본 참의원 선거가 종료되면 보복조치를 거둬들일 공산도 있어 그때가 되면 한일관계는 지금 최악의 위기를 넘길 수도 있다며 애써 비관론을 비껴가려는 축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더 할 수만 있다면, 한일관계를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크게 이용해온 청와대가 나서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청와대가 나서면 일이 더 꼬인다. 정 관여하고자 한다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일부터다. 결론은, 한일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서 승소하고도 굴욕을 당하고 있는 민간단체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그것이 먼저다. 기업 그만 옥죄어야 한다. 정치가 경제를 놓아야 한다는 소리다.
물론, 일제 징용배상판결은 명백히 역사의 문제요, 사법적 정의와 국가 자존의 문제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대일 정치력의 부재를 회복하는 것일 수 있다.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첫 소송 13년 만에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정부가 이를 '정치적으로' 조치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 판결로 신일본제철 국내 (주식)재산에 4억원 가량 압류하는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파장은 그 수천, 수만배에 이를 수도 있다. 그 잘난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는 우리 정부다. 때문에, 감정적으로 대응해 협상의 테이블을 걷어찬 상태를 벗어나 어서 협상의 테이블을 다시 놓는 일이다. 감정적 대응을 부추기는 쪽에 자제를 구해야 한다. 굴욕스러워도 그것이 결국에 이기는 길이라면 어쩌겠는가. 정부와 국민 모두 국익을 생각하며 냉철한 대응을 해야만 한다. 지금은 감정적 대응이 아닌 철저한 실리 외교가 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