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헤럴드 스위스=송경섭 칼럼니스트] 오랜만에 느끼는 스위스의 햇살은 강렬했다. 베른을 향해 달리는 승용차 옆에는 푸르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오늘 내가 가는 곳은 스위스 수도 베른에 위치한 ‘한글학교’다.
“그러면 전 오늘 과학수업 보조 선생님인 거죠?”
“네, 경섭 선생님은 오늘 제가 수업 중간중간 부탁 드리는 교보재들을 준비해주시면 돼요. 오늘은 한글로 과학수업을 특별히 진행하는데요. 풍선을 이용한 정전기 활동 때는 풍선을 불어주시면 되고, 비행기 제작 활동 때는 아이들이 가위질 하는 걸 도와주시면 돼요. 아마 아이들이 어려서 가위질이 서툴꺼에요.”
권남희 교장선생님께서 운전을 하시며 설명해주신다. 얼마 전 우연히 스위스에 한글학교(취리히, 베른, 제네바, 바젤, 세인트 갈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나는 5 세 이하 아이들(나눔반)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한글 과학수업에 보조교사를 지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베른에 위치한 지역 학교였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스위스 정부로부터 학교시설을 지원받으셨다고 한다. 방과후에 한글학교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미 학교 복도에는 많은 분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이들 간식을 먹이시는 어머니들, 서로 장난치는 생기발랄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들에게 한글로 과학수업을 하는구나!’ 나는 간단히 어머니들께 인사를 드리고 아이들을 위한 수업을 준비했다.

베른 한글학교는 한인, 한서가정 2-3세대 혹은 한글을 배우고픈 현지인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곳이다. 1996년 베른 한인회에서 그 모태를 찾을 수 있다. 초기 김연숙 선생님께서는 교실비 조차 버거워 본인의 집에서 어린이반의 한글수업을 진행하셨다고 한다. 그러다 점차 교민, 스위스대사관, 재외동포재단 및 현지 분들의 도움으로 학교로서 행정적 기틀을 마련하고 스위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1대 김정주 교장 선생님부터 5대 권남희 교장 선생님까지 20년 넘게 베른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학교는 크게 성인반 (행복반)/어린이반 (나눔반, 사랑반, 배움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분 |
연령대 |
수업일 |
나눔반 |
3~5세 |
매주 수요일 14:15 – 16:00 |
사랑반 |
5.5세~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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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반 |
8세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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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반 |
성인반 (초급,중급) |
격주 수요일 19:00 – 20:30 |
교장 선생님께서는 무엇보다 스위스의 ‘언어정책’ 덕분에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스위스는 4개의 공용언어를 채택한 특이한 나라다. 스위스 헌법에는 언어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 헌법 제70조 4항 연방은 복수 언어를 사용하는 주들의 특별 활동을 지원한다.” 이는 스위스 내 각 민족의 정체성 및 다양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국가적 통합을 이끌어낸 스위스만의 리더십이다. 때문에 베른 한글학교에 대한 정보는 스위스 정부 사이트에도 기재되어 있다.

또 주목할 만한 점은 한글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의 증가이다. 바로 K-POP 열풍 때문이다. 가끔 스위스 친구들과 맥주라도 한잔하게 되면 강남스타일 음악을 같이 즐기기도 하고, 공원에서는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스위스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현지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과학수업’은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방법 ‘한글말하기’가 더 중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과학수업을 할 꺼 에요. 우리 각자 자기 소개를 해볼까요?”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과 함께 드디어 수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의 한국어 수준을 파악 알 수 있었다. 한국어가 능숙한 아이도 있었지만 독일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아이, 한마디도 못하는 아이 등 한국어능력이 매우 다양했다. 권남희 교장선생님께서는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로 말하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시며 (선생님께서는 두 언어 모두 이해하신다.), 동시에 ‘지금은 한국어로만 이야기하는 시간이에요~’라며 아이들에게 한국어 시간을 상기 시켜주셨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정전기’와 ‘비행기 만들기’ 다. 아이들은 평소에 독일어 혹은 프랑스어로 과학용어를 접하지만 이 수업을 통해서 한국어로 과학용어를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 나는 수업 중간 중간 의자정리며 풍선불기, 종이 선 긋기 등 수업 진행에 필요한 교보재들을 준비했다. 사실 나는 어린 아이들이 수업에 오래 집중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아이들은 직접 풍선을 불고, 머리에 비비고, 흐르는 물에서 정전기를 확인하는 활동을 하면서 점차 재미를 느끼는 게 보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한글 수업에 대한 집중과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안하신 나름의 노하우가 담긴 교육 방식이었다.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과학은 하나의 수업방법일 뿐 중요한 건 아이들이 직접 한글 단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그래서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단어를 반복하여 말씀하셨고 아이들의 발음을 한명 한명씩 교정해 주셨다.

개인적으로 한 아이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아직 소근육이 발달하지 못해 가위질을 잘 못하는 아이였는데, 나는 그 아이의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을 함께 사용하도록 유도해보았다. 아이가 종이에 그어진 선을 따라 가위질을 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가위질을 하나 끝내니 이 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어가 서툴어 산만한 태도를 보였으나 본인이 종이 하나를 완벽히 자르자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려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종이비행기를 다 만든 후엔, 아이들 모두 함께 비행기를 날려보며 과학수업을 마쳤다. 과학수업에 대한 학부모님들의 반응 또한 좋았다.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들과 어머님들께서는 따로 세미나를 진행하셨다. 아이들이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만 아이를 키우시는 부모님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는 교장선생님의 생각 덕분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글학교 수업보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해외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한글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실 베른 한글학교를 다녀와서 몇 일 동안은 조금 답답했다. 필자는 지난 30여년간 대한민국에서 교육 받고 자라온 사람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글로벌을 강조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때문에 영어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어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나의 입장에선 대한민국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연 한인 2세, 3세대 아이들에게 한글이 중요할까?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가슴에 와 닿는 이유를 느끼고 싶었다. 내가 이 기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개교 20주년 때 발간한 ‘한글 학교 작품 모음집’을 받아보고 나서였다.
책자를 받긴 했지만 과연 내 의구심이 풀릴지는 미지수였다. 모음집 속에는 스위스 베른 한글학교의 연혁과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사진 그리고 글들이 적혀있었다. ‘신맛’, ’말랑말랑’ 이라는 단어가 어려웠다는 아이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 어릴 적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사진앨범들이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모음집 속 “한글을 가르친다, 배웠다” 라는 이야기들 속에서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였다. 드디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 같았다. 자식과 함께하고픈 부모의 마음으로 한글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내가 한국어로 내 자식과 소통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쭉 사용해온 언어가 한국어니까. 그리고 내 자식이 한국어를 알게 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 자매,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과 대화할 수 있고 자식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글 속에 부모의 사랑이 담겨있던 것이다.

스위스 베른 한글학교
Hochfeld1, Hochfeldstrasse 42, 3012 Bern, Switzerland
교장 권남희 nhkwon2011@hotmail.com, 079 678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