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외 정세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하다. 한일 간의 갈등을 가지고도 그 해법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인지 냉철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할 수 있는지에 골몰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있는 국민들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방원이 무학대사에게 '돼지'라 했어도, 무학대사는 이방원을 '부처'라 하지 않았던가! 부처의 눈에는 세상만사가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세상만사가 돼지로만 보인다는 말이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좋은 생각과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생각이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큰사람이다. 큰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알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일지라도 존중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귀담아 들으면(以聽)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得心)는 교훈을 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는 귀담아 경청하는 일이다. 경청하는 자세는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경청할 줄 모른다. 나를 낮춘다고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키 작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키 큰 사람이 허리를 굽혀야 한다. 경청은 상대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배려로 상대방을 믿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겸손으로부터 나온다. 이처럼 겸손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나를 낮추고 상대방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청은 행복한 인생을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이다. ‘들을 청(聽)’을 보자. ‘임금 왕(王)+큰 귀(耳)+열(十) 개의 눈(目)+하나(一)된 마음(心)’으로 되어 있다. 훌륭한 임금(리더들)은 귀가 열려 있고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섣불리 결정하지 않고 10번 이상을 눈여겨 살핀 다음에야 결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지한 눈빛으로 보고 진심을 담아서 들어 주라.’ 는 의미로 풀이된다. 여기에다 기울여질 경(傾)이나 공경 경(敬)이 더해진 것이 경청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행위를 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인지, 표를 얻기 위한 일인지, 공천을 받기 위한 일인지, 자리를 지키기 위한 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한심해도 많이 한심하다. 표를 얻기 위해서 내놓는 각종 공약을 보면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된다.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놀고먹는 나라로 만드는 정책들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표를 얻기 위한 경청은 올바른 경청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는 경청을 실천한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세종대왕과 연산군, 사람에 따라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은 훌륭한 군주로 연산군은 그렇지 않은 군주로 각인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엽게 여기고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자 익히는 것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측우기,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와 같은 것을 발명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백성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경청하였기에 후손들의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임금으로 기록되고 있다.
연산군도 좋은 업적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사람들과 백성들의 소리에 경청을 소홀히 하였기에 좋지 않은 일을 한 것에 대한 기억들이 많이 부각되다 보니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강한 권력도 십 년 가지 못한다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에 충성하여 얻은 부귀영화는 후회를 남기지만,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며 쌓아가는 청렴한 업적들은 대대손손 훌륭한 유산으로 남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승 댁 개가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은 데는 문상을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와 같은 정승은 경청을 실천하지 않은 사리사욕에 가득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김수환 추기경이나 이태석 신부와 같은 분들도 있다. 두 분 모두 미소 가득 머금으며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은 울면서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실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내가 불행해지고 싶어도 불행해질 수 없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불행하다면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질 수 없단다. 주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경청의 실천은 이청득심(以聽得心)으로 이어져 서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안정된 사회가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