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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규 시사칼럼] 좌파와 우파의 선긋기 '무용론'
[강재규 시사칼럼] 좌파와 우파의 선긋기 '무용론'
  • 강재규 기자
  • 승인 2019.09.20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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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헤럴드 강재규 기자.

역사 발전에서 좌파와 우파가 갈리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때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때 국민의회가 열렸는데, 기존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공화파가 왼쪽에 앉았고, 기존의 왕정체제의 유지를 원하는 왕당파가 오른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 좌파와 우파를 이야기한다. 그 좌우파 이론이 요즘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에겐 완전히 물구나무서듯 뒤바뀌어 그 이론을 다시 정립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 돼버렸다. 평등과 자유로 대변되던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갈랐던 것이 지금은 이데올로기의 혼돈시대다. 좌우파 선긋기 '무용론'이 나올법 하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한 가설을 세워보자. 한 나라가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물자를 나르고 신속히 전장으로 가려면 길과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치자. 그러려면 돈(자본)을 모아 손재주(기술) 있는 자들을 불러모아야 한다. 그 중에, 남들은 하루 종일 1미터 길을 닦는데 어떤 한 놈은 2미터를 닦아나갔다. 그래서 남들에겐 빵을 하나씩 줄 것을 그 놈에겐 두 조각을 주었다. 그랬더니 다른 놈들 중에서도 빵 두 조각을 받으려고 더 열심히 일하는 놈이 여럿 나왔다. 길을 잘 뚫어놓으니 물자 이동(유통)도 빨라졌고, 다른 시원스런 길을 달려가니 좋아라 한다. 이웃 나라에서도 전쟁 대비를 해야 할 처지였다. 그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하루 일하고 나면 똑같이 빵 한 조각씩(결과의 평등) 주겠다고 불러모아 일을 시켰다. 그랬더니 일군들이 너나 없이 모두 좋아했다. 남들보다 뼈빠지게 더 일할 필요도 없었고, 적당히 일 하거나 때론 일 안해도 빵은 적당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와 공산주의사회의 출현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넘어와서는, 좌파는 진보쪽으로, 우파는 보수쪽으로 해석돼 고정이미지로 고착됐다. 여기에다가 우린 반공이데올로기에 덧칠되면서 좌파는 북으로 가서 북한 내지는 친 북한쪽으로, 우파는 남한의 대한민국으로 치환됐다. 그래서 좌파 이데올로기는 평등과 분배, 개혁 개념으로, 우파 이데올로기는 자유와 성장, 점진적 변화의 개념으로 확장됐다. 전자는 결과의 평등을 중시하는 반면, 후자는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 전자는 유한한 자원을 똑같이 나누자는 것이고, 후자는 개인의 노력과 책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말이 이론적으로는 '이론(異論)'이 없겠으나, 현실면에서 지금도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본래 새가 양날개로 날듯, 우리가 왼손 오른손 두 손으로 살아가듯 다 필요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국가 건립기로부터 산업화시대를 거쳐 민주화시대까지는 맞는 명제였다. 대표적인 예는 이승만 정권과 신군부 시대의 부패,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 소위 양김(兩金) 분열이 또한 그랬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집권여당내 계파갈등이 심각했고, 이를 관리하는 권력핵심부의 노력이 적지않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후 전반적으로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지면서 좌파의 단일대오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민주화과정에서 정권의 '주구'라 불리웠던 경찰 앞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맷집이 강해졌고, 그 이론적 무장을 위해 만나기만 하면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논쟁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좌파는 '담론'에 강했고, 우파는 '현찰'을 찾는데 강해 부(富)를 축적해갔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민주화가 가져온 열매는 '권력'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결과물로 보상받았다. 오래 굶주렸던 늑대떼가 들판의 물소를 사냥해 살점하나 남김없이 마구 뜯어먹듯, 그 피의 향기에 취할만큼 좌파들에게는 천국인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소위 강남 좌파들이 '소리소문없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승자독식의 정치판에서 누릴 것이 너무 많았다. 특권과 반칙없는 세상을 때마다 구호로 외치던 좌파들이 뒷구멍에서는 달콤한 특권과 반칙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뜯어먹는데 정신이 팔린 탓일까, 그러다보니 치열한 담론을 잊었다. 도덕적 우월성을 잊었다. 조국 사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정세분석에 근거한 전략적 무장화나 노선을 두고 치열한 내부 토론, 담론이 실종됐다. 정신적 도덕적으로 허약체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운동권시대에 이름깨나 날리던 인사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주류사회로 등장했으나, 그들은 어느새 투사로서의 색채를 바래버린, '기득권' 세력의 꼰대처럼 '변질'된 상태였음이 최근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운동권 추억'만 가진 채 현실에서는 모든 우월성을 잊고 있었다. 그런 허약체질로 현실 정치 참여를 외치며, 무슨 대단한 어젠다인양 내세우며 정권을 탐하니 80년대를 관통했던 시대정신도 사라진지 오래다. 오로지 과거 우파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균질화되고 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다 잊어버렸다. 권력은 잡았으나, 한때 싸움에 능한 대신 개발과 성장이론을 도외시한 탓에 '무능' 소리 듣는건 예사다.

반면에, 우파는 어떠한가? 독재 정권과 신군부 정권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상명하복'에 따라, 통일된 목소리를 내고, '위에서 주는대로 받아 먹는데' 익숙했던 중간급 정치 리더들에게서는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웠다. 완벽한 침묵이자 균질화, 복제화였다. 외양의 통합 속에 뒷구멍에서는 적당히 비리와 비위의 커넥션이 부를 가져온다는데 익숙했던 탓에 그 비리와 비위가 하나 둘 벗겨지자 최고 위의 리더부터 중간 리더 가릴 것없이 철창신세 줄줄이 진다. 과거 민주화 투사들이 철창을 가득 채웠던 그 방을 채워가면서. 보수가 부패를 거듭하다가 정권을 두어번 잃고 나자 너도 나도 목소리를 높인다. 다른 계파에 핏대를 올리며 손가락질하는 일도 잦아졌다. 때론 불구대천인양 완전히 갈라서고, 서로 비난하며 다툰다. 계파는 다를지언정 두려움에 분열은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은 옛일처럼 보인다. 과거 토목시대처럼, 다리놓아준다, 길 내준다 하며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들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이젠 성장과 발전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만 강조했다가는 표 다 잃을것만 같아 좌파 흉내도 적당히 낸다. 복지란 이름아래 '포퓰리즘'이 적당히 필요하다는 것도 눈뜨고, 적당히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통합을 얘기하지만 누구에게 비굴하게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음을 알고는, 작은 무리를 이루더라도 버틴다. 빅 텐트는 아니더라도 작은 텐트라도 비만 피할 수 있으면 되는 것같다.

하지만 분명한 명제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다는 점이다.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역사발전도 마찬가지다. 좌파는 좌파답고, 우파는 우파다운 시대가 가장 균형잡힌 시대다. 더불어민주당 내부 소수의견의 완벽한 침묵, 좌파 운동권 및 시민단체 세력 내부의 이념 및 사상의 소멸, 담론의 부재 등이 맞물리면서, 지금 좌파는 좌파독재화로 간다는 소릴 듣는다. 그런 소리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과거 담론에 강한 대신 성장이론에 귀닫았던 탓에, 권력은 쥐었으나 '무능'소리 듣는 일도 아주 예사다. 민주화 이후의 아노미처럼 방향감각에 둔한것처럼 보인다. 과거 민주화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민중의 지지를 얻을 만큼의 도덕적 우위는 회복해야 한다. 혼돈의 시대를 보내고 있는 소위 우파 자유한국당 역시 마찬가지다. 비굴한 몽상에서 깨어나보니 권력잃고 지지 잃고 더 잃을게 없는 신세란 걸 깨닫기 시작한다. 과거 진보의 전매특허 '분열'을 경험하듯 분열의 길에서 통합의 길을 이야기 하지만 과거 균질화한 보수의 시대는 가버렸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엔 각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래야 역사에서 살아남는다. 지금이 그 때다. 어쩌면, 조국사태는, 좌파든 우파든, 이데올로기의 혼돈을 마감할, 다시금 한 시대를 가를 역사의 분깃점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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