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보존 명령내리고 민간인 의사 참여 부검
-"박종철, 이한열 열사 잊혀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
박종철 부검 결정, 민주화의 계기 될 줄 알았다"
"사표쓸 각오로 박종철 시신 보존 명령을 내리고 부검 지시해 사건의 은폐 막았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를 만들어냈던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 14일이다. 요즘 최고의 흥행작 '1987'에서 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박종철 열사.
그 사건을 물고 늘어져 의문사로 처리할 사건의 은폐를 막고 물고문 치사를 밝혀냈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인 최환 변호사(75.하정우역)가 한 라디오에 출연해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민주화의 젊은 영웅"이라며 당시 숨은 얘기를 털어놨다.
![고박종철열사등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그린 영화 '1987'에서 최환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사진내 사진)역을 맡은 하정우[사진=영화 1987중에서 켑처]](/news/photo/201801/1786_2072_4829.jpg)
변호사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뒤 대전지검 검사를 거쳐 서울지검 공안부장, 서울지검 차장검사, 대검 형사부장, 대검공안부장, 서울지검장, 대전고검 검사장을 거쳐 변호사로 전직했다.
지난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 부총재였던 고 이인구 전 계룡건설회장을 밀어내고 공천을 받아 자민련 대덕대덕구에서 출마하기도했다.
그는 최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1987년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던 고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 치사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최 변호사는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그날(1987년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날), 경찰이 부산에 사는 박 열사 부친에게서 화장 동의를 받아와 자신(검사)의 동의를 요구했으나 의문이 많아 화장에 동의하지 않았다”라면서 “의문사라는 점 때문에 사체 보존 명령 내린 뒤 다음날까지 용산 경찰서장으로부터 변사 사건 발생 보고서를 받아오라고 지휘하고, 부검 지시를 했는데도 경찰이 시체도 안 주려고 하니까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까지 받아서 민간 의사까지 참여시켜 물고문 사실을 밝혀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1987’의 영화에서 하정우가 자신의 역할을 한 데 대해 “외모상 저보다 크고 머리 반절은 더 있고, 그리고 나이가 젊고요”라며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제가 30년 전으로 거슬러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때 하정우 배우가 그거를 연기하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게 뭐냐 하면, 저는 시체를 몰래 덮어서 암매장해서 의문사 숫자를 하나씩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반대다”라며 “사람이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합당한 명분도 있어야 되고. 그래서 이제 저한테 다른 업무 때문에 알만한 두 사람(당시 치안본부 대공처직원)이 찾아온 데서 시작됐다”라고 했다.
그는 “두 사람은 밤 늦게 다 퇴근하고 (공안부장검사인) 나밖에 안 남아 있는데 ‘왜 오셨냐’ 했더니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사람이 죽었는데 여러 의사들이 다 보느라고 시간이 걸렸다”라면서 “그건 약간 좀 저한테 피하려고 한 소리고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하더라”라고 입을 열었다.
그런 뒤 “그 사람들은 급해서 자기들은 부산에 가서 박종철 군의 아버지를 만났다. 박군의 아버지(박정기 옹)한테 설명하면서 ‘조사를 받다가 그냥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하니까, ‘그러면 할 수 없지요’해서 자신들이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박 군의 아버지가 ‘화장을 해주십시오. 화장해서 이제...”라고 하더란다.
최 변호사는 “두 사람은 ‘그래서 (박 열사)의 유골이 나오면 그건 이제 아버지한테 줘서 가루 만들어서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장례 치르겠다’라고 박 열사 부친인 박정기 옹이 그렇게 선선히 얘기를 해주시니까 경찰이 안심하고 그냥 합의서 도장 찍어줘서 그거 가지고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날 화장 여부는 수사 지휘권 갖고 있는 공안부장검사인 자신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이어서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이라고 부연했다.
![14일로 지난 1987년 경찰의 물고문치사로 숨진 고 박종철 열사의 추모30주년이다[사진=노컷뉴스켑처]](/news/photo/201801/1786_2075_5525.jpg)
그러나 그는 “제가 보니까 저도 몇십 년 한 검사인데 당시는 그(서류만 딱 보고 화장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라면서 “그래서 그동안 업무 연락도 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한테 못 할 소리가 어디 있느냐. 다 털어놓아라 했더니 ‘고문은 안 했어’라며 아니 고문 얘기도 안 했는데 ‘고문은 안 했습니다’ 이러더라구요”라고 회고했다.
그는 “그러더니 ‘쇼크로 죽었다. 저기 심장마비로’ 어떻게 보면 심장마비도 고문하다가 당하는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두 사람 얘기가 갈팡질팡해서 제가 이건 뭐 어떤 종류의 고문을 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고문 때문에 죽은 것은 틀림없겠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화장해서는 안 되겠다. 이건 내가 내일 밝은 낮에 정식으로 변사 사건 발생 보고서를 써서 가지고 오라. 변사 사건 발생 보고서는 거기서 대공경찰이 쓰는 게 아니고 관할 경찰서장인 용산경찰서장 이름으로 가져오라“라고 요구했다.
최 변호사는 고 박종철 열사의 사체를 화장을 하고 변명을 할 수 있다고 판단, 즉시 ‘사체 사체 보존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후 그날 밤 사이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나 협박을 받았다.
최 변호사는 “어디 어디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다. 저와 아는 사람들 혹은 중간중간 가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한테서 전화가 오는데 어디가 그러면 압력의 시발점이냐. 그거는 청와대예요. 또 안기부고”라고 했다.
이어 “강 모 치안본부장, 대공처장하는 박 모 씨한데 왔다. 이들은 공안부장검사한테 얘기하는데 잘 안 된다는 둥 이렇게 저렇게 하면 청와대 쪽에서나 이런 곳에서는 거기다가 압력 넣다가 안 되면 우리들도 내부에 장관 청장이 있으니까”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런 식으로 은연 중에 그거 대학생 하나 죽은 거 가지고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마라. 지금 시국이 개헌이냐 호헌이냐 하는 것도 있고 또... 이런 식으로 전화가 왔다”라고 밝혔다.
그때 경찰은 박종철 열사를 대공처에서 수사하면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라고 보도 자료를 통해 밝힌 뒤였다.
그는 다행ㅎ; “다음날 변사 발생 보고서를 받아서 제가 부처 상관인(서울지검) 검사장한테 갔는데 그분이 참 잘 해주셨다. 가만히 공안부장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도 고문에 의심이 간다”라면서 “고문이다 딱 얘기는 안 하시고. 그러면 공안부장이 알아서 하라. 저한테 아주 그냥 재량권을 주시더라”라고 했다.
그는 ‘부검 명령을 하는데 박 열사 시신을 경찰병원에서 내주지 않았다는데’라고 묻자 “그러니까 법원에서 부검을 하기 위한 사체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다. 문제는 검찰 업무 처리에 변사 사건 발생할 때는 공안부 형사부 검사가 하도록 되어있다”라면서 “그래서 형사부 당직 검사를 배정해 주셨는데 누구인가 봤더니 용산경찰서 담당하는 부서가 형사2부 안상수 검사더라”라고 했다.
당시 안 검사는 훗날 국회의원을 거쳐 새누리당 대표를 지내다 현재 창원시장이다.
그는 영화에서 시신을 놓고 몸싸움을 하는 대목도 증언했다.
그는 “당시 경찰병원은 서울 왕십리에 있었서 제일 가까운 한양대병원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시신을 안 내놓으려고 해서 ‘경찰에서 조사받다가 죽은 사람이고, 지금 고문 여부가 가장 중심적인 키포인트인데 그것을 경찰병원에서 부검을 하고 부검의도 경찰병원 의사와 산하기관인 국과수의 황 모 박사가 부검을 한다니 말이 안된다’ ”라고 우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식 부검을 하는데 장소만 일반병원으로 온 것 뿐이지 거기 집도의는 경찰 의사나 국과수의 황 모 박사 이렇게 하니까 한양대부속병원장한테 전화해서 일반 의사를 더 참여시켰다”라며 “또 안 검사에게 특이한 소견이 나올 때마다 적어라, 좀 의사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 의사한테 사인을 받으라고 하니 완벽하니까 꼼짝을 못 하더라”라고 회고했다.
부검 후 사인(死因)에 대해 “사인을 물고문으로 나왔더라도 그 당시 돌아가는 분위기는 덮어버리려고 그랬다”라면서 “그래서 그게 지켜진 것이고, 인권 보장을 해주기 위해서 이제는 수사기관에서도 함부로 고문 못 하게 한 데 조금 기여한 셈”이라고 했다.
당시 ‘이러다가 검사 옷 벗겠구나라는 이런 생각은 안 했느냐’고 묻자 “옷 벗을 각오를 했다. 솔직히 검사로서 검사에 임관된 뒤로 남들 하기 어렵다는 공안부장까지 했는데”라며 “그래서 사표 내라면 사표 내고 혼 좀 나라고 하면 또 끌려가야지하고 각오를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결심과 함께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리라는 생각했느냐‘라는 물음에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냥 단순히 어느 특정한 사람이 고문당해서 죽었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 민주 절차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고백했다.
영화 속에도 나오는 물고문 치사 결론난 후 치안본부 쪽에서 진범을 감추는 헤프닝과 옥중에서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관들의 도움을 받아서 외부에 있는 김정남 씨를 통해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으로 가서 세상에 알려진 데 대해 그는 “이 과정에는 직접 관여는 안했다. 위에서 싫어했고, 너는 이제 손 떼고 다음은 형사부가 맡으라는 일이 생겼다”라고 비화를 소개했다.
공교롭게 이부영 전 의원과 김정남 전 의원, 최 변호사는 서울대 정치학과 같은 동기생이다.
그는 “너는 손 떼고 형사부에서 하라 하니까 형사부에서 자기들이 직접 해야 되는데, 또 그리고 다 밝혀진 거 아닌가. 그러니까 공안부에서 해야 되는데 그것을 경찰의 부서로 보냈다”면서 “그리고는 (경찰)당신들이 초동수사, 초벌수사를 해서 우리한테 보내라”라고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시사프로그램인 CBS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사진=노컷뉴스 홈페이지]](/news/photo/201801/1786_2073_5051.jpg)
이어 “그게 바로 경찰이 원하는 거 아니었나. 그러니까 경찰 가해자 5명인데 둘로 축소하고 셋은 빼버렸지 않은가. 이래 놓으니까 검찰이 도와줬다. 경찰이 축소하는 것을. 결국은 검찰하고 경찰이 똑같이 처음에는 은폐하려고 하다가 안 되니까 그다음에는 축소 조작을 해서 똑같다. 때문에 검찰도 한동안 욕을 많이 먹었다”라고 했다.
그는 1987 영화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본 젊은이들에게 “뒤늦게라도 젊은이들이 그 당시의 민주화운동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그 뜻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하는 데는 이 영화의 공이 굉장히 크다”라면서 “영화가 있기 전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가 서서히 전부 다 잊혀가는 것이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종철 열사하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단초를 제공해서 문을 열어준 게 아니냐”라고 했다.
최 변호사는 검사로서 사명을 다해 억압과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채 박종철 군 의문사를 물고문 치사로 밝혀낸 공로로 훗날인 1997년 율곡인권상을, 이어 지난 2007년 국제평화언론대상 대민봉사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