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힐링프로젝트" = 충청헤럴드 x 인성역전
-인성역전=교육, 철학, 상담, 심리 전문가가 풀어주는 인성에 대한 재미있는 수다
-교육= 원은석 교수 / 철학= 정윤승 교수 / 상담= 서명석 박사 / 심리= 김현경 작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보니 대학 1학년의 두 학기가 훌쩍 지나버렸다. 처음 맞이한 겨울방학은 매우 어색했다. 학기 중 끊임없이 누군가와 무언가를 하며 지내 온 시간을 벗어나 덜렁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심심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오겠지 하고 과방에서 죽치고 기다리자니 추위를 이길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그 당시는 휴대전화가 없고 삐삐를 사용했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은 꽁냥꽁냥한 기분이 계속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불 속에서 뒹굴던 중 우연히 책꽂이에 있던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라는 책이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때 친하게 지내던 서무실 누나가 졸업선물로 준 것이었다. 받은 당시 고마움에 한두 번 훑어보고 내버려 두었던 터라 갑자기 내용이 궁금해졌다.
심심했던 데다 내용도 딱히 어렵지 않아 금세 다 집중해 읽었다. ‘어쩌라고!’ 처음 자기계발서를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책에서 제안하는 50가지가 대부분 구구절절 좋고 괜찮은 내용이었으나 막상 뭘 해볼까 하니 무엇을 먼저 할지, 어떻게 할지, 뭐가 실제로 도움이 될지 잘 정리되지 않아 금세 또 잊어버리고 며칠을 어영부영 보냈다. 그러다 문득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들을 보면 내가 그날 읽었던 내용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해야 할 것들이 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이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 당시 나왔던 자기계발서를 검색이 되는대로 찾아서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 한 두 권 정도는 집중해서 읽었으나 그 후부터는 대부분 내용과 구성이 비슷비슷해서 후루룩 라면 먹듯 금세 훑어 내려갈 수 있었다. 여러 책들을 두루 살펴본 결과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대부분 비슷했다. “행복하게 살려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아라.” 이 생각이 머릿속에 ‘띵’ 하고 정리되자 엄청난 일을 해낸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이제 금방 내 인생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까지는 무려 군복무를 마치고 난 후까지 햇수로는 꼬박 3년이 걸렸다.
어떤 책에서 읽은 방법에 따라 좋아하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대학 일 년을 막 마친 치기어린 당시의 원은석은 좋아하는 것이 참 많았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어릴 적부터 글을 끼적거려 왔기에 작가가 되고 싶었고, 영화도 좋아해서 영화대본도 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만화책과 소설책을 많이 읽어 책 대여점 주인도 되고 싶었고, 대학 전공이 영어교육이고 전공공부가 적성에도 맞아서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당시 엄청나게 유행했던 ‘스타크래프트’를 나 또한 너무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PC방에서 밤을 새웠고, 같은 게임방 출신 친구가 스타크래프트 초창기 리그에서 4강에 올라가면서 나 또한 프로게이머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도 좋아해서 여기저기 여행 다니면서 글을 쓰는 여행 작가도 되고 싶었다. 학원 강사는 언제나 될 수 있다 생각했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리스트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행복해지려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면 되는데,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도 탈이었다. 어쨌든 직업을 가져야 하니 돈이 되는 일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고 해도 결국엔 늘 버리기 아까운 한 두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비슷한 것들끼리 서로 묶어 봐도 선택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을 동시에 다 할 자신은 없었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좋아하는 것 찾기’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후로도 간간히 불쑥불쑥 떠오르긴 했지만 역시나 진도는 나가지 않고 금세 잊곤 했다.
그러다 2학년 봄, 큰 전환점을 만나게 되었다. 2학년에게 봄은 신입생들이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선배가 되어 지금까지의 얄팍한 경험과 철학을 총 동원하여 대학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면서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멘토질 시즌’. 나는 누군가의 인생 멘토가 되어보려고 열성적으로 멘토질을 수행하였고, 술자리에서는 만나는 후배들마다 멋진 조언을 날려주려 애썼다. 어느 날 우유부단한 성격이 싫다고 고민하는 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엇인가를 질릴 때까지 해보면 결국 싫은지 좋은지 알게 될 거고 그렇게 하나하나씩 고민해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해주고, 그 말에 서로 감동받으며 술을 퍼마셨다. 잠자리에 누워 오늘 후배에게 날렸던 멋진 조언을 떠올리면서 만족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띵’하면서 오랫동안 진도가 나가지 않던 ‘좋아하는 것 찾기’가 착착 정리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게 많다면,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지 어렵다면, 질릴 때까지 해보면 되지 않을까? 진짜 좋아하는 거라면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을 거 아냐? 하루 종일 해도 안 질리면 그게 좋아하는 거겠네. 그리고 행복한 삶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인생인데 적어도 80살까지 산다고 하면 앞으로 60년 동안 매일매일 하루 종일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그게 진짜 좋은 거겠네! 하루 종일, 매일매일, 60년 동안!
이 기준을 적용해보니 ‘좋아하는 것’ 리스트를 대폭 정리할 수 있었다. 일단 게임과 노래방, 춤추기, 잠자기, TV보기 등 사소한 것들은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날릴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책읽기도 이 항목 때문에 정리되었다. 이렇게 털어낼 것을 털어냈더니 남은 것은 ‘선생님’과 ‘글쓰기’였는데, 이 둘은 직업으로도 평생 취미로도 나에게 큰 가치를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어서 글 쓰면 되잖아’라고 결론짓고, 스스로 엄청 대견해하며 만족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멘토놀이의 킬러 콘텐츠로 자주 사용되었다. 간혹 무엇인가 좀 덜 명확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줬고, 나 또한 나름의 과정을 거쳤기에 이것이 결론이라 확신했었다.
이 결론은 2년 후 뒤집혔다. 군복무를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나 다소 여유와 자유가 생긴 상병시절부터 나는 아까운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소대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중대 책까지 다 읽고 나서는 다른 중대에 놀러가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철학에도 아주 가늘게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여름 밤 새벽, 보초근무를 서다가 두서없이 현상과 본질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 순간 또 ‘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의 내렸다고 생각했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명확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되어 글 쓰는 것’이라는 결론은 단순히 내가 가지고 싶은 직업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합쳐놓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가르치는 일’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안에 숨어있는 무언가 였다. 그게 무얼까 잘 생각해보니 곧 결론이 나왔다. 내가 하루종일 매일매일 60년 동안 해도 좋아하는 무언가는 바로 ‘변화’였다.
변화라는 키워드를 생각해 낸 다음 지금까지의 생각 과정을 돌이켜보니 정말 딱 들어맞았다. 하루 종일 매일매일 ‘너 어제보다 더 멋지게 변했는데’하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하면 그 일이 무엇이든 60년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이든 학원 강사든 또는 소설가든 직업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직업에서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그만일 것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도전했고 좋아했고 해보려고 했던 대부분의 경험과 시도들은 모두 변화라는 키워드에 수렴하고 있었다. 스스로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그때서야 ‘변화’라는 단어로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숙제를 드디어 풀어냈다는 성취감에 정신이 또렷해지고 가슴이 쿵쾅거려서 그날 보초근무를 마치고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한동안 붕붕 떠다니는 기분으로 지냈다. 벌써 15년 전 경험이나 아직도 그 새벽근무에 맛보았던 짜릿한 기분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때의 깨달음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내 빡빡한 일상을 보고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살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몸이 피곤하기는 해도 재미있고, 전혀 힘들지 않다. 그렇게 많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후로 나는 내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한 번은 꼭 물어본다.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그리고 매일매일 하루종일 60년 동안 해도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엉뚱한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았거나, 진지하게 찾고 있는 사람과는 오랫동안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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