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일지(白凡逸志)』는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金九)주석의 자서전이다.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 2권으로 상편은 1929년 김구선생이 53세 되던 해에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두 아들 김인과 김신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쓰여 있다.
하편은 1932년 한인애국단의 항일거사로 상하이를 떠나 충칭(重慶)으로 옮기며 기록한 것으로 광복 전까지 이어온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초판본을 발행한 이후 국내외에서 10여 본이 중간되었다. 『백범일지』는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의 인생과 독립 전후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세민숙(世民塾)>의 노일호 숙장님께서 권유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철부지인 1949년초 대전사범학교 부속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여남은 숙생(塾生) 중에서 유독 숙장님의 사랑을 받은 나는 책을 받자마자 밤새워 읽었다.
어려운 말은 터득하지 못 한 채 무작정 읽어댔다.
독서에 조숙했던 탓에 일본문학전집도 그 무렵 겁 없이 덤벼들어 읽기를 했던 참이라 『백범일지』에 금방 정을 붙였다.
두 살 위의 동네 형한테 얻어맞고 복수하려고 식칼을 들고 기습을 시도했다가 창암(김구의 아명)이 재차 얻어맞는 장면에 어설픈 공감을 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수저를 억지로 분질러 엿을 사먹는 악동의 구실에 부질없는 찬탄을 해대기도 했다.
그만큼 김구선생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김구선생은 불행히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평소 가까이 했던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했다.
그 소식에 어린 가슴이 미여진 나는 『백범일지』를 다시 사독오독(四讀五讀)하게 되었다. 진정 독립투사의 일지(逸志)에 몰입했다.
그건 김구선생의 애국심에 감복한 탓이다.
그런 『백범일지』가 통곡할 일이 벌어진 현장을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무관심 속에 ‘황성 옛터’가 돼버린 현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참으로 분하다.
잡초가 우거진 중국의 충칭시 남서쪽 옛 임시정부 한인촌의 조그마한 사진과 함께 실린 신문의 기사는 사라져가는 임정(臨政)의 유적을 처량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규모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충칭시내의 항일 유적지가 절반 이상 사라졌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광복군 총사령부와 한인촌 건물들이 일부나마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우리나라 청년들이 탈출해 충칭으로 찾아왔던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주상복합건물이 들어 서 있다는 것이다.
내년이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데 임정의 마지막 보루였던 충칭의 임정청사 4곳 가운데 3곳이 사라져버렸다.
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중경에서 기장 쪽으로 40리쯤 되는 곳에 토교라는 시골 시장이 있는데 그곳에 . . . 기와집 세 채를 짓고 2층 민가 한 채를 사들여 100여 명의 대식구를 살게 했다”는 기록이 무색할 정도로 그 건물들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단다.
큰 도로와 댐이 들어서면서 산비탈의 토교 한인촌도 완전히 날라가 버린 것이다.
임정의 요인들이 살던 오복리 거주지는 이제 사유지로 바뀌어 그 안으로 들어가 살펴 볼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오호라! 『백범일지』가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무심하게 내박쳐 둬 임정청사 몇 개만이라도 보존하지 못 한 조국 대한민국을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 건가.
나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 모든 게 그냥 사라진 못난 추억이 아니다. 아쉽게 잊어버린 ‘아름다운’ 과거가 아닌가.
애국을 앞세우며 목청을 돋우는 정치인들이여 『백범일지』의 통곡에 귀를 기울일 지어라.
윤 기 한(충남대 명예교수,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