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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한의 직언직설] 교과서와 집필자 패싱
[윤기한의 직언직설] 교과서와 집필자 패싱
  • [충청헤럴드=윤기한 논설고문]
  • 승인 2018.03.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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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한 충청헤럴드 대기자(충남대 명예교수. 전 충남대영문과교수.시인,평론가. 세종TV대표)
[충청헤럴드=윤기한 논설고문]

학교에서 교과용으로 사용되는 서적이 교과서(textbook)이다. 초·중·고·대학 모든 학교에서 사용하는 학습용 교재가 곧 교과서이다. 학년 마다, 계열마다 각기 다른 교육내용을 담은 책이 교과서이다. 교과서는 교육의 본질을 제시하는 원문인 셈이다. 교육자나 피교육자나 이 교과서를 토대로 해서 이른바 ‘가르치고 배우기’를 한다. 그래서 교과서는 매우 중요한 교육의 도구인 것이다. 교육내용의 원본이며 실체이다.

우리나라 초·중·고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는 필수와 선택의 과목에 따라 갈라지고 국정과 검정으로도 분류된다.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주관하여 제작한다. 검정교과서는 국가, 즉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출판된다. 국정교과서는 선택의 자유를 갖지 않으나 검정교과서는 교육기관의 선택에 의해 채택된다. 작년에 국정역사교과서의 파동이 말해 주는바 국정교과서는 다양한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시비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얼마 전에 초등학교 6학년 1학기용 사회과목 국정교과서가 말썽이 되었다. 그 교과서의 연구·집필 책임자도 모르게 자그마치 213건이나 되는 부분이 수정되어 물의를 일으켰다. 게다가 그 수정과정에서 교육부가 압력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가려달라는 검찰고발까지 일어났다. 도대체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이다. 책을 만드느라 연구를 거듭해서 집필을 한 사람을 제쳐놓고 정부가 개입해서 이래라저래라 압력을 행사했다는 자체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큰일이다. 대수롭잖게 생각하기 쉽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학생을 가르칠 교육내용의 실체 원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내용이 피교육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일제 강점기에 책보에 고이 싸서 어깨에 메고 다닌 교과서는 귀하디귀한 보물이었다. 일본선생의 지독한 감독감시가 있어서도 그랬거니와 학생인 우리 자신이 교과서를 신성시 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게 되는 갖가지 지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던 해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국어 교과서의 달인이었다. 그 1년여 전에 아버지로부터 언문(諺文, 한글 지칭어)을 배워 한글을 읽을 줄 알았다. 이미 보문산 자락에 있던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있던 참이다. 그러니 “철수야 놀자”로 시작하는 국어 교과서를 다른 아이들 보다 잘 읽어서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받아쓰기 모범을 보여주는 행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교과서는 어떤 것이든 모두가 친구였다.

무궁화의 그림과 함께 우리나라 국화(國花)에 대한 애정이 그 당시에 교과서에서 터득한 애국심의 산물이다.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금강산은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라는 자부심을 키웠고 역사교과서는 요동반도가 우리의 옛 영토라는 자긍심을 일깨워 줬다. 우리 백의민족이 웅녀의 자손이기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교과서의 교훈을 신주처럼 모셔왔다. 그게 우리 민족의 진짜 삶이라고 세뇌(洗腦)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널리 이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홍익인간’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홍해인간(弘害人間)’이 돼버린 현실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홍해인간’은 제발 우리의 DNA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쨌거나 교과서라는 건 특히 어린 학생들이게는 성경보다, 코란보다 더 크게 머리와 마음에 파고들어 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교과서의 가치는 무한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과서를 가지고 못된 짓을 했다는 교육부의 처사는 참으로 치사하고 옹졸하다.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의 집필 책임자인 진주교대 박용조 교수의 도장까지 도용했다는 사실에는 아연실색을 지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박 교수가 협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버젓이 그의 도장이 ‘교과서 수정보완 회의록’에 찍혀 있다는 것이다. 수정내용에 불만을 가진 박 교수가 회의에 불참한 것을 되레 나무라는 김상곤 교육 부총리라는 사람의 해괴하고 민망한 변명이 눈물겹도록 딱하고 구차하다.

어쩌다 행운을 얻어 교육 부총리 감투를 쓴 전직 교육감이라는 위인이 ‘편찬기관(진주교대)과 발행사(지학사) 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핑계를 대는 몰염치는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할 사항이다. 그는 ‘진주교대 교수의 수정거부’라고 하면서도 ‘교육부의 수정 불 관여’를 되풀이 주장하고 있다. 논리의 모순이며 비약이다. 교육부의 ‘발뺌작전’이 마각을 들어낸 꼴이다.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의 수정요청을 거부한 사태가 저지른 책임전가 행위이다.

어쨌거나 무슨 책이든 그 책의 집필자는 책의 내용에 대한 무한책임자이다. 그가 기록한 책의 내용은 독자의 검열을 통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헐값이나 무상으로 양도되거나 폐기된다. 옛날 종이 생산도 어렵고 인쇄술도 시원찮았던 시절에는 교과서도 교복의 경우처럼 ‘대물림’을 했다. 잘 사는 지금의 학생들은 그런 ‘쪽팔리는’ 신세는 아니라서 대를 물려 입고 쓰는 일은 알지도 못 할게다. 행복한 세대라서 그런 게다. 제발 ‘집필자 패싱’은 ‘절대 노(N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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