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헤럴드 스위스=송경섭 칼럼니스트] "반응이 진행되는 동안 뭘 해요? 하루 종일 계속 지켜 보나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 스위스 고등학생 소녀가 질문했다.
"왜 스위스에 왔어요? 무얼 연구하고 싶어요? 이 물질이 왜 중요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내가 무엇을 연구하는 사람인지 학생들에게 조근 조근 설명해 주었다. 이 물질은 나노 크기의 작은 구멍들로 이루어진 물질 (일명 다공성 물질)이며, 이를 이용해 이산화탄소, 수소, 메탄 등 가스 분자들을 저장, 분리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술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특히나 연료전지, 수소자동차 등에도 쓰일 수 있다고. 어느새 모든 아이들이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눈빛과 ‘에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흥, 곧 알게 될 꺼야’ 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반응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대학원생들은 할게 참 많지. 연구관련 논문도 읽어야 하고, 다른 실험을 해야 하기도 하고, 학부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 연구성과가 좋으면 학회에 가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지. 자, 다음 실험을 같이 해볼까?"
내가 말해 놓고도 새삼스레 내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비전공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한달 전 교수님으로부터 WINs (Woman in Science & Technology)프로그램에 관련된 메일을 받았다. 윈스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여학생들 (한국나이 17 ~ 18 세)이 내가 속한 프리부르 대학(University of Fribourg)에 방문하여 본인들이 관심 있는 학과(물리, 수학, 화학 등)의 랩에서 하루 동안 실험을 진행해보는 프로그램이다. 대부분 대학원생들과 함께 실험을 진행하며, 학생들은 연구분야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들의 생활, 진로 등에 대해 자유롭게 묻고 들을 수 있다. 메일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학생들은 영어소통이 가능하다고 한다. 괄호치고 수줍음이 많음. 이라고 적혀있다. 사실 프리부르 지역은 프랑스, 독일어 두 언어가 공용인 지역이다. 그리고 지리적 특성상 대부분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걱정이 앞섰다. 스위스에 온지 아직 석 달 밖에 되지 않아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인데, 갑자기 스위스 여고생들을 가르치라니, 그것도 프랑스어를 단 1도 못하는 우리에게... 영어로 소통 가능하다고 하니, 우선은 그녀들을 위한 실험 설계가 필요하다.

화학실험교육저널(Journal of chemical education)에서 내 분야와 관련된 논문을 찾았다. 이를 참고해 하루치 실험을 설계하면 될 듯 하다. 그리고 우리 랩이 속한 층 구석 오피스에 3D 프린터가 한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노 사이즈 크기의 구멍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아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합성될 구조물을 프린트 하기로 했다. 그렇게 3월 12일 당일 날 아침이 다가왔다. 우리는 랩에 할당된 8명의 여학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지정된 장소로 이동했다.
"이 방에서 오늘 너희가 합성할 다공성 물질을 3D프린터로 만들어 볼 꺼야." 아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프린터를 바라본다. 3D 프린터를 처음 본다고 했다. 문득 한국에서는 쉽게 3D프린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히 대전에서는 메이커톤 행사, 3D 프린터 교육이 대전 창조경제지원센터, 대전 국립중앙과학관(무한상상실)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어떤 면에선 한국이 스위스보다 기술적 보급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3D프린팅을 시작하고 실험실로 이동했다.



안전 고글과 실험복, 실험장갑을 착용한 아이들은 2~3 명 씩 그룹을 이뤄 실험을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모든 기구가 신기한가 보다. 실험방법에 따라 시약의 무게를 재고, 용매를 섞어보기도 한다. 화학 반응을 설명해 주면,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스위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몰라 가끔 아이들이 모르는 개념으로 설명할 때면 여지없이 질문을 한다. 꽤 날카롭다. 그걸 또 영어로 설명하려니 조금은 벅찼지만 나름 재밌는 경험이었다.

"저는 화학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오늘 이 랩을 선택했어요. 사실 지금 제 부전공은 이탈리어이긴 한데, 다음학기에 화학으로 바꿔볼려구요."
응 ? 고등학생들이 화학을 부전공한다고 ? 내게 이것저것 질문하던 한 소녀가 던진 말이었다. 알고보니 스위스 프리부르에서는 고등학교 때 다양한 부전공을 선택 할 수 있으며 (화학, 법, 영어, 스페인어, 문학, 예술 등), 전공 이동도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학문을 미리 경험하면서 본인의 적성과 맞는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수능을 위해 3년 간 아침부터 밤까지 입시공부에만 매달렸던, 조금은 우울했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대학가서 놀아, 대학만 잘 가면 되겠지 등 전혀 검증되진 않았지만, 저러한 말들로 나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근데 돌이켜 보면 입시공부를 할 때보다 오히려 클럽활동 시간, 필자의 경우엔 신문활용교육(NIE, Newspapers in education) 시간을 통해, 내가 하는 공부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앞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 무얼 하고 싶은지 고민해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1주일에 단 한번이었지만.
그리고 이 곳 학생들 대부분 2,3개 외국어가 가능하다. 물론 스위스가 지리적으로 유럽 한가운데에 존재 하기 때문이겠지만. 문득 스위스의 언어 교육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프리부르 지역은 프랑스, 독일어 공용지역이다. 학교에서 이메일로 올 경우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모두 적혀있다. 아마 구글 번역기능이 없었다면 진작에 짐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과학 분야에서는 영어도 공용어로 사용됨으로 다행히 나는 살만하다.
다공성 물질을 합성한 후, 나와 아이들은 준비된 설명서를 읽으며 과연 슈가모프가 이산화탄소를 저장할 수 있는지 드라이아이스를 같은 비커에 넣어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노란색 슈가모프는 빨간색을 띠었고 아이들은 신기하다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실험이 끝난 후, 우리는 둘러 모여 마지막으로 소감을 나누었다. 스위스와 한국. 살아온 배경은 다르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오늘 집에 돌아갔을 때, 이 경험을 꼭 한번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직접 대학교 화학과 실험실까지 찾아서 실험을 해보니 자신이 정말 즐거웠는지, 연구자들과의 대화는 어땠는지, 화학을 더 공부해보고 싶은지 말이야. 오늘 하루는 너희들이 앞으로 경험할 많은 일들 중 하나 일꺼야. 그러니 꼭 다시 생각해보고 본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
라고 영어로 이야기했다. 이렇게 들렸기를 나는 믿는다. 내 마음이 조금은 전달 되었는지, 미소를 띤 아이들이 오늘 고마웠다며 내게 말해주었다. 순간 아이들과 소통하고 있는 지금이 낯설었다.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에게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살던 내가 이런 말을 하고 대답을 듣는 모습이 말이다. 나름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사실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양한 경험과 함께 본인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있어 보였으니까. 필자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다양하게 경험하고 내 적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시행하는 ‘진로 교육의 날’은 이런 점에서 참 반가운 일이다. 중고등학생들이 관심 있는 직업을 직접 체험해본다면, 분명 본인의 진로 결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한 번의 경험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침대에 누워 학창시절 내게 영감을 주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