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 지방선거가 흥이 나지 않는다. 후보등록도 끝났고, 곧 본격 선거전에 들어간다. 후보들의 단상만 뜨겁다. 말만 풍성하고, 언론들만 분주하지 단하의 열기는 냉랭하다. 누가 누군 지, 어느 당에 누가 나왔는지 관심이 예전같지 않다.
지난 휴일 저녁, 세종을 찾은 유력 여론조사기관 대표와 서울의 정치외교학 교수와 함께 했다. 나와 함께 1980년 초반 한국언론재단의 정치 분야, 사회분야 전문기자 교육을 받은 연수 동기들이다. 세 사람 모두 국회와 청와대에서 정치부 기자로 뛰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나만 그대로다.
화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때마침 대전과 충북, 서울 등 곳곳에서 범 보수 후보 단일화가 화두였기에 말이다. 광역단체장 후보든, 국회의원 재. 보선 후보든, 기초단체장 후보든 모두가 똑같다. 지역도 충청권을 물론, 전국의 대부분이 여권의 강세다.
-범보수진영이 꺼낸 후보단일화
대전시장 후보인 바른미래당 남충희 후보와 자유한국당 박성효 후보가 28일 만나 담판을 짓는다. 박 후보의 단일화 제안에 남 후보가‘조건부 수용’을했기 때문이다. 남 후보가 ‘연합정부 구성’이란 낯선 조건을 붙여 화답을 한 것 이다.
기울어진 판세에서 보수 후보 간에 단일화가 묘수일 수밖에 없다. 여러 달 째, 심지어 후보등록 직전까지 한국갤럽. 리얼미터조사를 보면 민주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하게 고공 행진속 에 있기에 말이다.
여당 지지율 고공행진은 한 지역에서 그런 게 아니다. 호남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민주당의 지지율이 강세다. 뿐 만 아니다. 이념과 계층을 떠나 민주당에게 지지율이 몰려있다. 20, 30, 40대 만이 아니다. 모든 연령층이 그렇다.
제1야당인 한국당보다 정당지지율이 두, 세배의 차이가 있다. 대구. 경북지역을 뺀 충청. 호남. 수도권에서는 그 차이가 더 심하다. 그렇지만 이는 기류이자, 지지율 수치일 뿐이어서 투표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처럼 31일부터 본격 선거전에 앞서 핫 이슈는 야권 후보 간 단일화다. 구체적으로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중도내지 보수 후보 간 단일화의 성사여부가 변수다. 정치협상과 골프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속설 그대로다.
민주당 후보를 누를 카드는 보수 후보 간에 합치는 카드 밖에 꺼내들 것이 별반 없다. 여야, 야야 후보 간 공약과 정책도 엇비슷하니 말이다. 보수 후보들이 곳곳에서 만난 민심에서 여당 후보의 초 강세기류를 실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위에 ‘우파 분열’, ‘보수 몰락’을 체감하는 까닭이다.
문제는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것은 보수의 몰락이다. 이날 모인 여론조사기관 대표나 정치학 교수의 생각은 보수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1987년 3김 씨(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재등장부터 ‘민주진보진영의 변화’는 시작됐으나, 보수는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제도권에 안주한 보수는 밥 먹을 때만 빼고, 집 앞에서 짓지도 않고, 늘 잠 만자는 불독과 같았다. 거대한 공룡이 닥쳐올 빙하기를 예견하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멸종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제도권에 안주한 보수, 그 사이 민주세력 확장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사태에다, 지난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등은 보수 추락의 예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의 실체가 드러나 그제야 보수가 비상상태임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큰 상처와 충격은 보수 지지층에 엄청난 실망의 늪에 빠뜨렸다. 결과는 국회, 나아가 보수 정치권의 내부의 균열로 치닫게 된 것이다. 이게 끝난 게 아니고 5.9대선을 정점으로 계속 진행형이다.
반면 민주 진보 층은 다르다. 고비마다 결집으로 이어갔다. 곧 박. 이 전 대통령이 남긴 흔적과 상처들을 치유(治癒)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의 길에 동참하고 나선 셈이다. 여기에다, 1,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와 긴장완화합의는 선거에 분명 플러스 요인이다.
복기해보면 민주진보의 변화는 1987년 6월 항쟁의 성과다. 그해 87년 직선제 헌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내손으로 우리의 최고통치자를 뽑겠다는 열망과 최루탄을 덮어쓴 외침이 허망하게 끝나기도 했다.
그해 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DJ(김대중), YS(김영삼)가 그 여망을 담아내지 못했다. DJ와 YS가 욕심을 부려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 바람에 군사독재정권의 후계자인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모두 패했다.
-김대중.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민주세력결집
후보 단일화의 아픈 교훈은 민주진보진영을 더 결집시켰다. 다음해 4월내 치른 총선의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DJ의 평화민주당은 호남과 서울·수도권에서의 대승, 원내 2당이 됐다.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JP의 공화당도. 그리고 부산. 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YS의 통일민주당까지 야 3당이 여당인 민정당을 압도했다. 대통령은 민정당이었지만 여소야대를 이룬 국회는 광주 및 5공 청문회에서 민주진보의 힘을 보여줬다.
그 후 3년 뒤인 1990년의 정치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민주진보 세력이 허를 찔렸다. 여당인 민정당이 영남 민주계를 대표하는 YS계와 보수의 분신 JP를 끌어들여 여소야대를 뒤집은 인위적 정계개편을 해버렸다. 정치상황에서 치명적이었다.
1990년 1월 31일, 3당 합당을 결의한 통일민주당 전당대회가 생생하다. 3당 밀실야합이자, 신당참여를 거부하는 김상현 부총재와 노무현 의원이 대회 진행이 불법이라는 외침과 울분뿐이었다. 참여하지 않은 이들과 민주진보세력은 꼬마민주당을 만들었고, 낡은 정치청산을 들고 나왔다.
그 바람에 전통적으로 야도(野都) 부산은 하루아침에 여도(與都)가 됐다. 지금 민주당 원류인 평민당은 호남을 기반으로 지역정당으로 위축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이 밀실야합을 통해 민주진보세력을 포위한 셈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을 직접 뽑자던 1987년의 열망은 1990년 3당 야합을 통해 짓밟혔다. 오히려 3김의 지역주의 정치가 싹을 틔웠다. 3김 씨의 이 지역패권은 30년간 이렇게 유지됐다.
때문에 민주진보진영은 뼈아픈 교훈 속에도 민주화의 열정을 더 살렸다. 실패와 실패를 거듭했으나, 역동적이었다. 희생과 탄압이 따랐지만 유권자의 변화와 바람을 일으켰다. 곧 1997년 대선에서 DJ는 JP와 후보 단일화와 유사한 DJP연대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유권자의식의 큰 변화가 선거판 좌우
그 뒤 민주세력의 구심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옮겨갔다. 그는 당시 386(30대의 80년대학번, 60년대 출생)의 엄청난 지지와 보수의 야당인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로 대세론의 이회창 후보를 꺾고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정 후보가 마지막 날 파기를 했지만 말이다.
이 민주세력은 2004년도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 이명박 정권초인 2008년 촛불, 그리고 2016년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탄핵촛불까지 대통령을 방어또는 공격, 끌어내리는 정치적인 힘이 되었다.
민주진보세력의 결집은 30년간 지속됐던 지역주의 정치의 종언이다. 영,호남 대결구도를 깨자는 것이었다. 보수는 그런데도 영남지역주의에 안주했다. 지난 2012년 선거 당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보수 장기집권 우려가 나왔던 것도 이 지역주의 정치공식에 바탕한 것이다.
6.13선거에서 나온 기울어진 운동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을 찍고, 2002년 노무현을 찍은 젊은 유권자들이 이제 40대, 50대,심지어 60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30대가 주축이던 진보 지지층이 20대에서 50대까지 전연령층으로 확대된 것이다.
보수정권이 반세기를 이끌었다, 때문에 과거 민주당을 보면 지역정당 내지는 청년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당이 지역정당으로 위축되고 민주당이 국민정당이자 전국정당으로 되는 추세로 전환된 꼴이다.
그렇기에 보수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이다. 민주진보세력이 지향한 대로 유권자의 시각이 변화하며, 실제 정치와 밀접하게 진행됐다. 유권자들의 변화는 2000년대 초반에 일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보수층은 최근까지 지역적 기반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홍준표 대표가 TK와 경남 등에, 민주평화당이 호남에 올인하는 것이 그 예다. 그렇기에 괴리는 점점 커져간다. 지난 2016년 4.13 총선과 5.9 대선에서 영남, 호남에서 균열이 오기 시작한 것을 상기하면 될 텐데 말이다.
-지역주의에 매몰됐던 선거는 구시대 유물
과거에는 그랬다. 대구나 광주에서 지역당 후보로 말뚝만 세워도 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경남은 물론 대구·경북도 한국당으로 나가면 된다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김부겸 행안부장관이 대구에서 당선된 것도 그 변화다.
대전 등에서 시도되는 후보 단일화니, 후보 연대니, 정치 연정이니하는 카드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 말기 연정 제안이나,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안희정 충남지사의 연정이 집토끼마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한 언론은 최근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말을 소개한 적이있다. 그는 청년기 시기의 정치성향이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했다. 이른바 ‘코호트 효과’다. 그러나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보수화되는’ 연령효과를 압도한다. 지금은 그 세대의 기점이 1963년생부터라고 했다.
그후 현재의 20대까지 압도하는 코호트, 세대정치에서 진보가 승리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역주의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정치 행위자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보수 몰락’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답은 보수에 있다. 이교수의 말을 대입하면 홍 대표나 한국당 지도부가 TK중심의 보수선택은 표피적 분석인 것이다. 바닥에 흐르는 유권자의 정치인식 변화, 그리고 투표를 통한 정정당당한 나의 권익을 찾으려는 변화의 흐름을 봐야 한다는 데 절대 공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