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힘들다 보니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행동하기보다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며 저렇게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심지어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만나고 왜 또 내일 만날까?
저에게 있어 만남은 언제나 의식이요 행사였습니다. 미리 날을 잡아야 하고 참석자도 잘 선정하여야 하고 장소도 근사한 곳으로 잡고 행사 계획도 짭니다. 심지어 대화 주제를 미리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일상 만남은 언제나 국빈 만찬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수다 떠는 것과 국빈 만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전자를 시간 낭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제 만남은 국빈 만찬의 품격을 지니길 원했습니다. 소주 한 잔과 국빈 만찬은 그 기능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는 소주 한 잔의 기능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소주 한 잔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저는 최근 책 한 권을 읽으며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 소주 한 잔을 못 한 제가 지난 40년 동안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조나 레러의 [사랑을 지키는 법(A book about love)]입니다. 그는 [애착(Attachment)]이라는 발달심리학 용어를 소개합니다. 애착은 유아가 부모와 형성하는 친밀한 정서적 유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는 애착 이론을 정립한 에인스워스(Ainsworth)의 낯선 상황 연구(the strange situation task)를 먼저 설명하였습니다.
유아를 엄마와 같이 장난감이 있는 방에 놀게 합니다. 잠시 후 낯선 사람이 들어오고 이어 엄마가 나가 버립니다. 분리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잠시 후 엄마가 다시 돌아와 재결합하고 낯선 사람은 나가 버립니다. 필요에 따라 이 상황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에인스워스가 주목한 것은 유아가 엄마와 재결합하였을 때의 반응이었습니다.
66%의 유아들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울다가 엄마가 안아주자 울음을 그치고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인스워스는 안정 애착(secure atrachment)이라고 불렀습니다. 22%는 엄마가 돌아왔을 때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고 12%는 엄마가 돌아와 안아주어도 계속 울었습니다. 에인스워스는 전자를 불안정 회피 애착(Insecure-avoidant Attachment), 후자를 불안정 저항 애착(Insecure-resistant Attachment)이라고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가 성인인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애착 이론은 초기에는 유아에 대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네소타 대학 심리학자 에겔랜드 팀이 40년간의 연구 끝에 12개월짜리 유아의 애착 경험이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인간관계는 물론 지능, 건강 등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항 애착을 보인 아이는 32세가 되었을 때 안정 애착을 보인 아이에 비해 만성 질환을 겪을 확률이 3배 높았습니다.
그러면 그 유형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엄마가 일관되게 애정을 보이면 유아는 대부분 [안정 애착 유형](엄마를 믿게 됩니다.)이 되고, 엄마가 기분 좋을 때는 아이에게 잘해주다가 기분이 나쁠 때는 신경질을 부리는 경우 [불안정 회피 유형](엄마를 의심하게 됩니다.)이 될 확률이 높고, 엄마가 없거나 있어도 늘 학대하고 화를 내는 경우 [불안정 저항 유형](엄마를 못 믿게 됩니다.)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엄마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애착] 형성 원리를 공부하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특히 결혼 적령기의 남녀는 연애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엄마가 연애결혼한 자녀는 연애결혼한 경우가 경험상 많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가 연애를 잘하였다는 것은 아빠와 애착 형성을 잘하였다는 말이고 그런 엄마는 아이와의 애착 형성도 잘하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대를 이어 연애 박사가 된 것이 아닐까요.
동물에게는 애착 행위가 핥고 쓰다듬는 것입니다. 연인들의 행동도 이와 유사합니다. 사람에는 또 무엇이 애착 행위일까요. [모여서 소주 한 잔하며 수다 떠는 것]입니다. 제가 시간 낭비라고 보았던 바로 그 행위들이 애착 형성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애착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애착 형성 과정에 대해 궁금하시면 갓난 아이나 강아지를 키워보면 잘 알 수 있다고 조나 레러는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제가 믿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그래서 제가 믿을 수 있는 존재로 각인이 되면 저와 애착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애착 관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애착 형성 과정입니다. 조나레러는 사랑도 애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두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처음 만나고 나서 심장이 뛰고 머릿속에는 줄리엣만 가득 차고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순간을 [도취성 사랑]이라고 규정짓습니다. 이 순간을 지배하는 것은 열정과 욕망입니다.
문제는 그 기간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동반자적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애착]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애정 어린 손길이나 멋지다는 칭찬을 한마디 건네고' '잡다한 일이나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누고' '함께 앉아 저녁을 먹고, 긴 산책을 하고, 잠자리에 누워 이야기하며 가까워질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40년간 밖에 나가 [큰일]을 하는데 바빠 집안의 이런 [시시껍절한 일]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시시껍절한 일]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불평불만을 할 때면 가끔 도와주기도 하였고 지금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희생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동안 못 도와주었으니 밀린 숙제하는 셈 치고 열심히 도와야지. 그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니까."
그러나 조나 레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과 안정적 애착을 형성한 사람들은 90세까지 살 확률이 40%인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13%밖에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까운 사람, 즉 아내와 안정적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동반자적 사랑이기도 하지만 아주 이기적으로는 장수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수하기 위해 100년 된 인삼을 먹는 것보다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이 원리는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수다 떠는 것은 애착 형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생 가족, 친구, 동료 등과 애착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애착을 잘 맺으려면 바로 이 소주 한 잔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두 저녁마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주 한 잔은 장수 보약이었던 것입니다.
조나 레러는 이런 말로 자신의 책을 끝맺음 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사람들을 둘러볼 때 그들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애착]이라는 개념을 너무 늦게 만났습니다. 어느 친구의 "우리 늦게 만났으니 자주 만나자"는 말처럼 [애착]을 늦게 만난 만큼 자주 만나렵니다. 오늘도 [Attachment]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