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세기 무렵에 조성된 백제 왕릉급 무덤인 익산 쌍릉(사적 제87호)의 주인이 서동요(薯童謠) 주인공인 백제 무왕으로 추정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8일 지난 1917년 일본 학자가 처음 조사한 뒤 100년 만에 다시 발굴한 익산 쌍릉 대왕릉에서 발견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당시 일본 학자가 목관 등의 유물을 거둔 뒤 인골을 따로 모아 다시 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익산 쌍릉은 대왕릉과 180m 떨어진 소왕릉으로 구성된다.
![전북 익산 쌍릉 대왕릉. [사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news/photo/201807/5527_7710_658.jpg)
대왕릉과 소왕릉은 익산에 새로운 백제를 건설하려 했던 백제 무왕(재위 600∼641)과 그의 부인인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각각 묻힌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졌다.
인골을 분석해보니 '60대 전후 남성 노인, 키 160∼170.1㎝, 사망 시점 620∼659년'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 남성은 벼와 보리, 콩의 섭취량이 높았고,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도 확인됐다.
쌍릉은 고려사 등 옛 문헌에 무왕과 그 왕비(선화공주)의 능이라 전해왔지만, 그동안 유물로 확인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지난 4월 익산 쌍릉의 대왕릉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인골이 발견되면서 백제 무왕의 뼈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대왕릉에서 발견된 나무 상자 안에 100여 개의 인골 조각이 담겨져 있었다.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 분석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 목제인골함(오른쪽부터), 실제 발굴뼈, 3D복제뼈가 전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news/photo/201807/5527_7711_812.jpg)
문화재청은 이번에 발굴된 인골의 사망 시점이 무왕의 재위 기간인 7세기 초와 일치하고, 나이도 50대 이상인 점으로 볼 때 무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립전주박물관이 2016년 일제강점기 조사 때 대왕릉에서 수습한 치아가 20∼40세 여성의 것이고, 신라계 토기가 보인다고 밝힌 것과는 상반되는 결론이다.
전주박물관이 이에대해 2년 전 공개한 자료를 토대로 대왕릉에 매장된 인물은 남성이 아닌 여성일 가능성이 크고, 신라계 토기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선화공주가 무덤 주인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지난 2009년 미륵사지 석탑에서 절을 창건한 사람이 신라 출신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王后)'라고 기록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반색할 만한 결과였다.
대왕릉은 조사 결과 무덤방이 매우 크고 공들여 다듬은 재료로 정교하게 조성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왕릉급 무덤이 확실시됐다.
여기에다 인골 분석 결과도 7세기 초반 사망한 키 큰 남성 노인이라고 나오면서 대왕릉은 무왕 무덤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이우영 가톨릭대 교수는 "전주박물관 치아 조사는 논리적 접근 방식은 합당했으나, 치아만으로 성별과 연령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며 "이번에 확인된 인골과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했을 때 전주박물관 치아도 남성 노인의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 분석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 목제인골함(오른쪽부터), 실제 발굴뼈, 3D복제뼈가 전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news/photo/201807/5527_7712_853.jpg)
또한 "뼈 부위에서 골화가 된 소견들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면서 "고칼로리 식이를 하는 경우에 보통 이런 증상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걸 봤을 때 식생활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던 분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신라계 토기도 전형적인 신라 토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듯하다"며 "비슷한 토기가 익산에서도 나온 바 있다"고 강조했다.
![전북 익산 쌍릉 대왕릉 석실 벽면 조사 모습. [사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news/photo/201807/5527_7714_114.jpg)
쌍릉은 고려 충숙왕 때인 1327년 도굴됐다는 기록이 있고, 무엇보다 인골이 무덤 주인공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골 102개에 동일한 부위가 없어 한 개체에서 나왔을 확률이 높지만, 일제강점기 조사자들이 여러 사람의 인골을 모았을 가능성도 있다.
대왕릉 주인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는 소왕릉 조사에서 발견될 공산이 크다. 연구소는 본래 올해부터 소왕릉을 발굴할 예정이었으나, 대왕릉 주변 지역 조사를 위해 발굴 시기를 내년 이후로 미뤘다.
![[도표=연합뉴스]](/news/photo/201807/5527_7713_933.jpg)
이성준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대왕릉 내부에서 벽화나 묵서 흔적은 찾지 못했다"며 "일제가 소왕릉을 조사하고 대왕릉처럼 유골을 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준 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소왕릉에 묻힌 사람이 선화공주인지, 사택적덕의 딸인지, 무왕의 또 다른 왕후인지는 모른다"며 "대왕릉 인골에 대한 추가 연구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호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은 "무덤 주인공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백제시대 상장례(喪葬禮)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