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 충청헤럴드 대표이사.발행인[전 대전일보 대표이사.발행인]](/news/photo/201808/5912_8173_131.jpg)
지난 해 늦가을, 전주에서 모임을 가졌다. 전. 현직 지역 신문사 사장들의 모임체이다. 대다수 골프 라운딩을 가졌지만, 허리 수술을 받은 터라 나는 인근 덕진 공원을 찾았다.
한낮 공원은 한적했다. 하지만 반갑게 맞아주는 분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세분의 동상(銅像)이다. 이 곳에서 태어난 법조인 세 분이다. 이들을 ‘법조 3성(聖)’, ‘대쪽들’ 이라고 했다.
그중에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전북 순창)선생이 눈에 띄었다. 그는 중앙에 있다. 양쪽에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전북 김제)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전북 익산) 전 서울고검장 등이 나란히 있다.
지난해 헌정사 초유에 현직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그리고 재판이 이어진 터라 의미가 남달랐다. 그래서 그에게 더 주목했는지 모른다. 항일 독립투사에다, 초대 대법원장이며 민법, 형법 등 기본 법률을 기초한 분이다.
선생은 김종인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의 친조부다. 그렇지만 단순한 법조인이 아니다. 법학자, 판사, 변호사, 사법행정가(대법원장), 법전 편찬자 등 다양한 일을 한 ‘총체적 법조인’이다.
그는 애국지사의 무료재판과 '한국 사법정신의 초석'을 세운 법관이다. 꼬장꼬장한 딸깍발이 선비 이미지를 가진 법관이다. 아닌 것은 분명이 아니라고 맞서는 법조인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의심받지 않는 법관.
그는 무엇보다 독재자 이승만에 항거하며 법을 지켰다. 이승만이 연임을 위해 발췌개헌을 만들었을 때도 헌법위반판결을 내렸다. 이승만 일당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도 ‘헌법만큼은 지켜야한다'며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위 권력을 고발한 일도 있다. 제헌국회가 1949년 친일파인 민족반역자 처벌을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도 구성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역시 반민특위법의 실행을 방해했다. 또 일제의 고등경찰이던 자들이 경찰의 실권을 그대로 잡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를 해체시킨 일이 발생했다.
![전북전주 덕진공원내 가인 김병로 초대대법원장 동상[사진=네이버 이미지켑처]](/news/photo/201808/5912_8175_857.jpg)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는 상부의 소행이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 중부서장 윤기병 등 6명을 상해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는 후배 법조인에게 남긴 말이 있다. 후배 법관들이 이승만 권력에 겁을 먹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법관의 몸가짐은 세상 사람에게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의심을 받게 되면 법관으로서는 최대의 명예손상이 된다. 그렇기에 늘 서로가 주의를 환기하여 공통적인 책임감을 견지해야 한다“
-김병로이 법조인에게 남긴 지기추상(持己秋霜)철학.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이듬해 설날 세배를 온 후배들에게 써준 말이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진에게 일렀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경구다. 채근담에 나오는 자경문(自警文)이다.
세배를 마친 한 법관이 가인에게 물었다. 후배 법관은 “대인춘풍이 중요합니까, 지기추상이 중요합니까”라고 물으니 가인은 “둘 다 중요하지만 법관에게는 지기추상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그는 법관의 명예를 중시한 분이다. 그러나 이를 법관만이 아니라 검사, 변호사들에게 넓혀도 적용해도 무방하다. 재조 법조인이든, 재야 법조인이든 법을 다루는 모든 이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법조 삼륜(三輪)이란 말이 있다. 법을 이끄는 세 개의 축(軸), 세 개의 바퀴다. 이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말한다. 지금 이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다. 정치권과 재벌에 줄을 대며 기웃대는 판사, 검사 한 둘이 아니다. 말이 변호사지 법률장사꾼이나 다름없는 이도 적지 않다.
여기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때 나온 사법행정권 남용은 보도내용대로라면 매우 심각하다. 처음에는 의혹수준이었으나, 파면 팔수록 불신의 골은 더 깊다. 최후의 보루라고 불렸던 재판마저 권력의 입맛대로 짜깁기했다니 ‘놀랠 노’자다.
한술 더 떠 의혹을 파헤치려는 검찰과 이를 방해하려는 법원간의 '장외 신경전'도 개탄스럽다. 예견된 꼴불견 힘겨루기가 시작됐을 뿐이라며 국민과 법조계 반응은 차갑다.
검찰은 최근 세 차례나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제외하고 기각되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마다 날 선 반응도 내놨다.
임 전 차장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양 전 대법원장 자택 등 나머지 영장이 기각되자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법원이 기각했을 때 입장을 밝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압수수색 영장에 장소와 범위, 재청구 사유, 법원 기각 이유 등을 밝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보통은 진행 중인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오히려 공개를 꺼린다.
-법원, 검찰간의 기싸움이 오히려 불신초래
대법원도 검찰 반응에 이어 수사자료 협조 상황을 알리는 장문의 입장을 내놨다.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의혹과 무관하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긴 파일 등이 포함돼 있어 비밀 등이 유출되지 않는 범위에서 임의제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신경전은 예견됐던 것이다. 사법부가 자체에서 밝혀낸 410개 문건 파일을 검찰에 넘긴데 그쳤다. 그러니 검찰은 즉각 반발했다. 수사 대상자가 건넨 기록만으로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리상 제출된 문건 파일만으로 진행될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논란은 법원행정처가 검찰이 수사에 필요하거나 관련성 있는 컴퓨터 저장장치 내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입장차는 여전하다.
![김병로 초대대법원장의 전북순창의 생가터.그리고 김병로 전 대법원장[사진=연합뉴스]](/news/photo/201808/5912_8177_1111.jpg)
이처럼 결국 수사자료 확보를 둘러싼 법원과 검찰 간의 기 싸움은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어 영장 발부 '열쇠'를 쥔 법원과 또한 검찰 간의 힘겨루기도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문제는 검찰과 법원이 신경전을 벌이는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 법원이 최대한 수사에 협조하겠다지만, 실제 모든 것을 검찰 손에 넘기기는 부담스런 눈치다. 검찰이 사법부의 내밀한 문건을 A부터 Z까지 살피면서 사법부 목줄을 틀어쥐게 둘 수 없다는 감정 때문이다.
일선 판사들 사이에서는 "검찰이 이 정도로 나올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원 속내가 검찰의 무분별한 수사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일고 있다. 법원은 거기에다 엄격한 영장 발부 기준을 제시하는 효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인 셈이다.
이런 해석은 법원행정처가 내놓은 입장 때문이다. 법원의 입장은 '의혹과 관련성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겨있는 파일에 대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공은 곤란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장을 심리할 판사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이유다. 그들의 말대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의도가 아니더라도 이런 설명 자체가 담당 영장 판사에게 충분히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높다.
-수사협조로 진실규명만이 법조신뢰
검찰의 장외 신경전도 마찬가지다. 이례적인 입장 발표 등을 통해 강제수사 동력을 확보하려는 계산이 깔렸다고 분석한다. 검찰은 앞서 법원행정처가 미온적인 협조를 넘어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법원행정처의 입장을 놓고 반발하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진행 중인 수사의 밀행성을 존중해야 하고, 피의사실이 추단(推斷)될 수 있는 등의 사정으로 검찰의 수사내용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드리지 못하는 점에 양해를 바란다'고 했다.
검찰은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가 "언제부터 이렇게 검찰 편의를 봐줬냐"며 비웃고 있다. 검찰은 시큰둥해 하지만 법원행정처의 미흡한 수사비협조 사실을 알려 강제수사 정당성을 확보한다면 하는 더 바랄게 없다는 입장이다.
즉, 법원의 비협조로 엄정한 수사를 못하는 처지임을 알리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수사가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원과의 장외 기싸움에서 완승하며, 검찰의 무너진 신뢰를 복원할 기회라고 보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사진=연합뉴스]](/news/photo/201808/5912_8176_957.jpg)
이번사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핵심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문건거래의혹으로 빚어진 사태는 법원행정처에서 비롯됐다.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는 등 강제수사에 나서면 일선 법원은 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과를 놓고 뒷말이 나올 것도 뻔하다.
-법원의 수사비협조는 제식구감싸기 의혹
사태의 원인을 만든 법원행정처가 그 책임을 일선 법원에 미루는 것은 옳지 않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검찰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 자료를 제공하는 게 마땅하다.
이를 뒷받침하듯 '재판 거래' 의혹 중심에 선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로비'를 했다는 시점에 대법관들이 유독 특활 비를 많이 지급받은 것도 의문이다. 대법관들은 사실상 수당처럼 월평균 100만원의 특활 비를 받는 것으로 파악됐다.
참여연대가 최근 공개한 대법원 특활 비 지급내역 분석 보고서를 보면 특활 비는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1월 처음으로 예산에 편성되기 시작, 올 5월까지 3년 5개월 동안 903차례에 걸쳐 모두 9억6천480여만 원이 지급됐다. 양승태·김명수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법원행정처 간부 등이 특활 비를 나눠 가진 셈이다. 역시 규명되어야 할 일이다.
검찰도 이번 일을 계기로 끊임없이 제기되는 '저인망식 수사' 가 아니라 핵심을 파고드는 수사가 되어야한다. 검찰은 환부만 도려내는 특수수사 기법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아직 요원하다. 검찰도 법원이 불리한 여론 속에서도 소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유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결론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가인 김병로 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꾸짖는 자경(自警)으로 썼다는 이말- 자신에게 엄격하라(持己秋霜)이 빛바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전두환 정권 때 5.18을 성공적 진압이라며 스스로 심사해서 훈장을 제목에 거는 일은 아니길 바란다. 이중 잣대, 제식구 감싸기라는 사법 불신으로 불이 옮겨 붙는 불행이 없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