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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노무현.문재인 사람...이해찬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사람...이해찬은
  • [충청헤럴드=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18.08.25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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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의 이해찬 국회의원(66.세종시)은 민주운동가다.

대학 시절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고, 또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김대중 내란음모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정치인이다.

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금배지를 달고 정치에 뛰어 들었고, 이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국무총리가 되고, 문재인 대통령때 집권여당의 대표가 됐다. 

[사진=이해찬 페이스북 켑처]
[사진=이해찬 의원 페이스북 켑처]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25일 선출된 이해찬 신임대표는 7선의 민주당 최다선 의원이자 친노(친노무현)계, 친문(친문재인)계 좌장이다.

충남 천안 출신인 8선의 무소속 서청원 의원에 이어 선수가 제일 많은데다, 여야로 신분이 바뀌면서 선수와 이력으로 치면 '원로정치인'로 불리고 있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서울 용산고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1972년 10월에 유신이 선포되자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한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다.

이철, 안양로, 유인태, 제정구씨 등과 함께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6.29 이후 그는 1987년 민주당의 여러 전신 중 하나인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김대중 당 총재로부터 5공 청문회 등을 보고 '가장 명석한 의원 중의 한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난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의 간판공약인 행정수도 이전을 직접 마스터플랜화할 만큼 당내 대표적인 전략통으로 꼽힌다.

[사진=이해찬 페이스북 켑처]
[사진=이해찬 의원 페이스북 켑처]

이 대표는 본선에 진출한 모든 선거에서 승리함은 물론 1997년 김대중 후보가 나선 대선에서는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을,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출마한 대선에서는 선거대책반을 맡아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 이어 지난해 5.9대선에서 중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당 정책위 의장을 3차례 맡았으며 국민의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당정청을 두루 거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기획준비단장을 맡았으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강력히 반대해 친노계 좌장으로 불린다.

지난 2007년에는 친노 단일 후보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대권을 노리기도 했으나, 정동영 후보와 손학규 후보에 밀려 3위에 머물렀다. 
18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해 친노·시민사회세력을 이끌고 혁신과통합을 결성했으며 2011년 통합작업을 통해 다시 민주통합당에 합류했다.
2012년에는 힘겨운 경선 끝에 가까스로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당 대표가 됐지만 야권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 측의 요청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사진=이해찬 페이스북 켑처]
[사진=이해찬 의원 페이스북 켑처]

완고한 성격 탓에 다소 독선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선거 슬로건도 '강한 민주당'으로 내세우며 강함을 강조했다. 
19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약세로 분류됐던 세종시에 출마하는 헌신의 모습을 보였지만 1991년과 2008년, 2016년에는 소신과 맞지 않는다며 3차례나 탈당을 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세대교체론에 밀려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당선 후 같은 해 9월 복당했다. 

그는 차기 2020년 5월 제 21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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