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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글 옮겨 읽기(2)] 언론인 조홍상 '피난살이 추억'
[명사의 글 옮겨 읽기(2)] 언론인 조홍상 '피난살이 추억'
  • [충청헤럴드=신수용 대기자]
  • 승인 2018.10.1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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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나이가 지긋한 지금이지만 고향이란 말 만들어도 아련한 향수에 젖어들곤 한다.

나의 고향은 충북 진천에 있는 한적하고 깊은 산골 마을이다. 면사무소에 볼 일이 있으면, 10여리를 걸어서 가야하고 군청 소재지와는 40여리나 떨어져있다.

그나마 언제부터인가 마을 앞으로 차가 다닐 수 있는 큰 길이 뚫려 버스가 다니고 있기는 하다.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버스를 이용하게 돼 환호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버스가 하루에 한두 번밖에 다니지 않아 자유스러운 나들이는 역시 어려웠다. 어쩌다 읍내에라도 다녀오려면 버스운행시간과 볼일 시간, 귀가 시간을 맞추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언론인 조홍상 선생의 수필집인 '살맛나는 세상'[사진=충청헤럴드db]
언론인 조홍상 선생의 수필집인 '살맛나는 세상'[사진=충청헤럴드DB]

지금도 승객이 적어 버스운행횟수는 늘지 않고 있어 자가용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직도 동네사람들이 신작로라고 부르는 이 찻길은 일제 강점기 지역민들의 부역으로 닦았다고 한다.

마을이래야 신작로 곁에 여,나무 채의 초가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고, 그곳에서 5분 쯤 논틀길을 걸어가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5,6채의 초가가 전부다. 가구 수가 적으니 주민수도 수십 명 정도로 적을 수밖에 없다.

전체 가구 중 타성은 2-3가구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같은 조상에게서 태어나 같은 성을 가진 집성촌이다.

주민 거의가 가깝거나 먼 친척들로 마을 사람들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라면 엄밀히 말해서 나의 고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 아버지는 물론 윗대 조상님들이 대대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에 고향이라고 해도 틀리 말은 아닐 것이다.

삼형제중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님은 그 시대의 관습대로 16살의 어린 나이에 일찍이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시골생활이 싫으셨던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노래에도 있듯이 호미자루 내던지고 무작정 혼자 서울로 올라가 방송국에서 취직을 하면서 서울생활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아기를 출산하려면 시골에서 도회지의 병원을 찾아 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어머님은 출산을 하기위해 오히려 서울에서 시골 고향집에 내려가 나를 낳아가지고 오셨단다.

그러니까 나는 어렸을 때 그곳에서 자라지 않았어도 고향에서 태어나기는 한 셈이다.

더구나 나는 서울에서 국민학교와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에 방학 때면 가끔 고향에 내려가 며칠 씩 묵으며 놀다 오기도했다.

그러니 그곳이 고향임에 틀림없고 추억을 떠 올리며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일 때 피난 가서는 그곳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에 정식으로 전학 수속을 밟고 짧은 기간이지만 고향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싸서 어깨에 메고 매일 10여리 길을 걸어서 다녀야하니 무척 힘들었다.

학교에 오고 가는 길 중간쯤에 길옆에 옆 산이 무너져 내려 산사태가 난 곳이 있었다. 이렇게 산이 무너져 흙이 쌓인 것은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어린아이로 물고 올라갈 때 생긴 흔적이라고고 했다.

아이들이 도시에서 온 나를 골려주려고 지어낸 얘기거리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을 혼자 지날 때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걸음이 빨라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안되어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몰려오자 외아들인 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다시 고향으로 피난을 갔다.

첫 번 째 갈 때는 옷 보따리와 간단한 생활필수품까지 챙겨 트럭에 싣고 트럭위에 올라타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 째 갈때는 차편을 구하지 못해 외가 식구들과 함께 대,여섯명이 그 먼 길을 걸어서 갈수 밖에 없었다.

평평한 길도 걸었지만 가깝게 질러가기위해 딜도 제대로 안난 산등성이로 높은 산을 넘기도 했고, 논틀길 밭틀길을 따라 힘들게 걸어서 갔다.

도중에 음식을 사먹을 식당도 없어 밥을 직접해먹기고 했다.

피난길에 밥상이나 그릇이 있을 리 없다.

낙엽이나 삭정이를 주위 모아 불을 지피고 큰 냄비에 밥을 해서 땅바닥에 놓고 일행이 삥 둘러앉아 각자가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한번은 밥을 먹는데 밥 냄새를 맡은 풍댕이 인가 검을 벌레가 날아들었다.

모두가 너무 배가 고팠던 지 아무도 벌레를 집어낼 생각이 없이 수저로 벌레를 이리저리 제쳐가며 밥을 퍼먹기에만 바빴다.

벌레를 집어내는 시간에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어야하겠다는 생존에의 욕구와 인간의 본능을 절감하게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지금껏 잊혀지지 않고 있다.

고향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한때 심각한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북한군이 남진하면서 깊은 산골인 고향마을에도 영향을 미처오기 시작했다. 가족같이 함께 어울려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패가 갈려 서로 반목하는 가하면 농산물 수확량을 조사하고 다니는 등 마을 분위기가 냉각되며 어수선했다.

하루는 주막에 소년들이 모여 북한노래를 연습한다며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때 내게 무슨 뱃심이 있었던 지 "노래연습은 해서 무엇하느냐? 나는 참석안하겠다"고 연락해온 소년에게 심한 욕까지 해서 돌려보냈다.

이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조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엄청난 곤욕을 치를지를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걱정하던 일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고, 그후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수가 있었다.

아마 전황이 급격히 불리해지면서 후퇴하느라 신경을 못 쓴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난생활이 이렇게 굿은 일만 있고 고달프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길지않은 피난 기간이었지만 여름이면 마을 앞 큰 길을 끼고 흐르는 시냇물 웅덩이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멱을 감았다. 송사리도 잡거나 산골짝을 흐르는 물에서 가재를 잡는 재미를 즐기곤 했다. 겨울에는 동네 청년들을 따라다니며 덫을 놓아 토끼사냥도 해보았다.

이 같은 재미보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고 계셨다. 보리수확 땐 보리 서 말, 가을 추수 땐 벼 서 말을 수업료로 받았다. 나도 동네아이들과 섞여 한문과 한시를 배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향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항상 기회가 되면 중단된 중학교 학업을 이어가야한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란 중이라지만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는게 안타깝게 여겨지던 때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부산에서 피난 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부산의 고모 댁으로 피난처를 옮기고 학교에 복학 했다.

바닷가에 판자로 지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당시는 교과과정에 한문이 있었다. 나는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덕으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반우들과 이목을 끌어 자랑스러운 때가 있었다.

언론인 조홍상 선생[사진=충청헤럴드DB]
언론인 조홍상 선생 [사진=충청헤럴드DB]

비록 고단하고 괴로웠던 피난 생활이었지만,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도 고향생각만 하면 어릴 적 고향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지금도 종친회에서 고향마을 뒷산에 마련된 납골묘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어 한식이나 추석 때 등 가끔 고향엘 들른다.

시대가 변해서인가, 옛날 어릴 때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전 피난시절엔 생활이 어렵더라도 친척집이나 타성집이라도 들르면 꼭 따뜻하게 대해주고 음식대접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활형편이 훨씬 나아졌는데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한다. 좀 서운한 마음기인 하지만 그렇다고 고향에 대한 애착은 떨칠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고향을 가더라도 피난이 아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향수를 달래기 위한 방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한밭수필 2017-9호>

필자 조홍상 선생은 누구= 충북 진천 출신으로 용산고, 성균관대 법대를 나와 대전일보 기자, 편집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이사, 대전일보부설 사회문제연구소장, 통일문제연구소장, 충남도 정책자문위원, 한국기자협회 충남도 지부장, 한국편집기자협회 부회장, ABC협회이사, 언론중재위원 대전중재부위원, 대전지법 조정위원, 대청미디어 포럼회장,(현)목요언론인 클럽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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