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금요일 아침 7시 20분 수업이 시작하려면 10분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맨 앞줄에 앉은 저는 뒤를 돌아보고 수업 시작 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중학생처럼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모르 파티라는 노래 들어 보셨어요?" "금년도 수능 금지곡 1위래요." 그러나 뒷자리에 앉은 서너 명의 학우들은 눈만 꿈벅이며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수업이 시작되었고 저의 수다는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날 하지 못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신문 기사를 보는데 "2018년 수능 금지곡 1위 아모르 파티"라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아침에는 그저 별 뉴스가 다 있네 하고 지나갔는데 밤늦게 집에 들어와 호기심에 '아모르 파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수능 금지곡이란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멜로디 중독성 때문에 수능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듣는 것을 피해야 하는 곡을 말합니다. 얼마나 중독성이 있길래 이런 표현까지 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모르 파티]를 듣고 그 궁금증이 해소되었고 그날 '아모르 파티'를 2시간이나 계속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모르 파티'라는 후렴구가 귀에서 맴돕니다.
'아모르 파티'는 2013년 트로트 가수 김연자가 컴백곡으로 불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잊힌 곡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2016년 12월 열린음악회 방송에 당시 최고의 그룹 EXO의 노래 다음에 '아모르 파티'가 불립니다. 이 노래를 들은 EXO 팬들이 이 노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고 2017년 대박이 납니다. 대박의 결정판은 2018년 5월 25일 부산대학교 축제에 김연자가 초대된 것입니다.
당시 부산대학교 학생회는 김연자를 섭외하였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대학축제에 트로트 가수?'라며 불만을 쏟아 내었고 학생회는 "타 사립대학교에 비해 학우분들이 많이 속상하실 줄로 압니다. 예산에서 정말 애를 먹었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와 용서를'이라는 답글까지 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떼창이라는 대박이 터져 TV 뉴스를 타기에 이릅니다. 1959년생 김연자는 제2의 전성기를 맞습니다.
'아모르 파티'는 여러 가수가 따라 불렀습니다. 유투브를 통해 다른 가수의 '아모르 파티'를 보다가 한 가수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외모는 걸그룹인데 노래는 장윤정입니다. 설하윤이라는 92년생 가수입니다. 너무 예쁘게 노래를 잘해 10번도 더 넘게 들었습니다.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이 가수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제가 TV를 보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이미 다 아는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가 대박이 난 사실'과 '설하윤이라는 가수가 스타가 된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설하윤은 12년간 아이돌 연습생으로 지내면서 30번의 도전을 하였으나 걸그룹 데뷔가 무산되자 1년간 PC방, 카페 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케이블 TV의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두각을 나타냈었고 이 프로를 본 트로트 작곡가가 그녀에게 댄스 걸 그룹 가수가 아닌 트로트 가수를 권유하게 됩니다.
12년간의 걸그룹 가수의 꿈을 접고 트로트 가수로 바꾸어 가수로 데뷔한 것이 2016년 9월. 가수로는 늦은 나이인 25살에 데뷔하여 2년만인 지금 '군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군부대 위문공연 섭외 1위로 당당하게 올라섰습니다. 아모르 파티를 부른 [김연자]나 따라 부른 [설하연] 모두 아픈 인생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운명(Fati)을 사랑하였기(Amor)에 오늘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날 수업 시작 전에 불쑥 [아모르 파티]라는 수능 금지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요. [Amor Fati]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그 수업이었기 때문입니다. 2016년 6월 24일 김상근 교수님은 호메로스의 오딧세우스를 강의하면서 5권 223-224절에 나오는 구절을 설명하였습니다.
"오딧세우스 일행들이 항해를 하던 중에 바다의 괴물 싸이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오딧세우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들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 오딧세우스는 그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그는 그것이 그의 운명임을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그 운명을 사랑합니다. 'Amor Fati' 아모르 파티,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2016년 6월 24일 이렇게 시작한 고전 공부 수업은 지난 금요일 수업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첫 강의에서 배운 말 'Amor Fati', 그리고 마지막 강의 시작 전에 수다거리로 시작한 노래 '아모르 파티'. 고전 공부의 시작과 끝이 모두 'Amor Fati, 아모르 파티'라는 사실에 숙명 같은 섬뜩함이 느껴집니다.
그날의 수업은 저와 같이 공부를 하는 삼십여 명의 학우들에게는 뜻깊은 수업이었습니다. 친구 강신장 대표의 기획으로 연세대 김상근 교수님으로부터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2년 6개월 만에 김상근 교수님과 헤어지는 마지막 수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가장 유서 깊은 공부 모임인 '루첼라이 정원'에서 이름을 빌려와 공부 모임의 이름을 루첼라이 정원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처음에는 그저 이름만 알지 읽어보지 못한 고전을 조금이나마 알아보자는 가벼운 마음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수업은 김상근 교수님이 그 고전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신 후 고전의 중요 대목을 그림과 글귀 중심으로 같이 읽어 나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고전을 다시 읽지 않더라도 몇 대목은 직접 읽는 효과가 있는 강의 방식이었습니다. 발췌독이라고 할까요. 김상근 교수님이 워낙 탁월하게 발췌하셔서 그 문장만 읽어도 그 고전 한 권을 읽은 듯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수업을 시작하여 시즌, 학교식으로 말하면 학기를 다섯 번 하였습니다. 시즌1에서는 서양 기본 고전을, 시즌2에서는 로마사 및 로마 고전을, 시즌3에서는 게르만 명저를, 시즌4에서는 인도 고전 명저를, 시즌5에서는 셰익스피어 명저를 읽었습니다.
김상근 교수님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이런 다양한 고전을 읽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다양한 분야의 리더들에게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의 자기희생이 없었더라면 저희는 이런 강의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신장과 김상근 콤비는 대한민국에 고전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삼십여 명의 저희 공부그룹이 공부를 시작한 이후 2기 3기 4기 5기까지 이어져 300명 정도 되는 분들이 같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지적 호사를 누려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 월요 편지를 10년간 쓰고 인생 공부가 취미가 되었다는 건방진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인생 공부의 바탕에는 루첼라이 정원에서의 고전 공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냥 살다가 갈 인생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은 바로 고전 공부입니다.
루첼라이 정원 교재의 첫머리에 [고전의 힘]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고전의 힘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질문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답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선각자들이 던진 최초의 질문에는 새로운 삶을 향한 진리의 단초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질문으로부터 인간의 사유는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 갔고,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