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용 충청헤럴드 대표이사.발행인(전 대전일보 대표이사.발행인)]](/news/photo/201811/8152_11255_4818.jpg)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지난 9월 초 대국민 담화를 냈다. TV로 생중계된 담화는 반성문이었다. 첫마디부터 끝까지 “아르헨티나는 분수에 넘치게 살고 있다”고 후회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1960년 초까지 세계 6대 경제대국이었던 그 나라는 미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나라가 2003년부터 오늘까지, 15년 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에 의지해 연명하는 처지가 됐다. 올 들어 페소화 가치가 미국 달러 대비 50%가량 폭락, 지난 5월 IMF에, 또 500억 달러의 구제 금융도 신청했다.
-세계 6번 째 경제대국에서 추락한 복지재정
그는 “문제를 하나씩 고쳐갈 수 있다는 지나친 낙관론에 빠져 있었다”며 “점진적인 개혁 방식은 실패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2003년에 이어 또다시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포퓰리즘 정책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그런데도 아르헨티나는 무상복지 등으로 방만한 재정이 위기를 불렀다”고 자책했다. 그러니 국가재정이 해마다 마이너스, 즉 적자재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세금보다 큰 규모의 지출을 지속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수출세 신설도 밝혔다. 그는 “수출세가 ‘나쁜 세금’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이기에 세금을 낼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며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요구했다. 이어 “이 위기는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위기가 돼야 하며 개혁을 위해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면서 고강도 대책도 냈다.
그러면서 콩·옥수수·밀 등 곡물 수출금액 1달러당 4페소의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했다. 정부 부처를 절반으로 줄여, “공무원을 대폭 감축할 것”이라고도 했다. GDP(국내총생산)의 5~6%선인 재정적자를 줄여 페소화 가치를 안정시켜 국제금융시장에서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무상 복지 등 포퓰리즘 정책의 후유증으로 경제위기가 반복돼 왔다. 전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모든 학생에게 노트북을 무상 지급할 정도였다. 연금 수급자를 36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늘리는 등 방만한 복지정책으로 재정 부담도 키웠다. 개혁 정책은 노조 등의 반발에 부딪혀 포퓰리즘 정책으로 돌아가곤 했다. 경제위기가 반복됐다. 아르헨티나는 결국 1958년 이후 IMF에 20여 차례나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의 담화는 바로 다음 날부터 저항에 부딪혔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무원들이 항의 시위를 시작으로 포퓰리즘의 단맛에 길들여진 국민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각종 보조금을 축소하겠다고 하자 전기요금과 대중교통 요금이 큰 폭으로 뛰었다. 연금 삭감안에 대한 반발도 컸다. 지난 이맘 때 50%가 넘던 그의 지지율은 30%대 선이다.
-통계수치가 말하는데도 '위기'아니라는 정부
아르헨티나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대한민국 경제의 상황이 매우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과 통계청이 각종 경제지표를 발표할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제추락과 민생파탄, 그리고 미래의 불안이 확인되어 위기를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국정운영을 책임 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하는 우려를 지울 수없다. “왜 위기임을, 왜 위기 가능성을 알아채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절로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경제 체질과 사회 구조가 바뀌고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좀 기다리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야권과 학계 일각에서 핵심정책인 소득주도성장론이 고용 참사와 민생고(苦)의 중대 요인이라는 지적이 잇따르자 비슷한 답변뿐이었다.
문 대통령이 지난 5월 31일 이런 지적에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를 자신 있게 설명하라. 긍정효과가 90%다”라고 주문한 것과 맥락이 같다. 지난 9일 물러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현 정권의 경제책사다. 그런 그도 이 같은 교과서이론만 앞세웠다.
그는 “내년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실질적인 성과들을 국민들이 체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제에 대한 근거 없는 위기론은 국민의 경제심리를 위축시켜 경제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가 나빠지는 건 정부 정책이 잘못이 아니라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 때문이고, 그런 걱정은 근거도 없는 것이란 얘기였다.
그가 떠나기 전 국회에서 현 정권이 가장 잘한 일로 소득주도성장이라고 꼽았다. 그러자 민주당 의원들은 “야당과 보수 언론이 경제위기를 조장한다”고 그를 도왔다. 액면 그대로 들으면 야당과 보수언론의 비판 때문에 경제 위기가 온다는 게 여권의 논리인 셈이다.
만에 하나 잘못되어 경제가 더 엉망이 된다면 여권은 뭐라 말할까. 국민의 삶이 더 망가지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까. 야당과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언론, 학자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올 연말에 좋아진다더니 다시 내년으로 말바꿔
청와대나 여권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한다. 얘기가 사실이길 바란다. 또 그래야 한다. 앞에서 봤듯이 아르헨티나처럼 허약한 국력, 국민의 쪼그라진 삶, 불투명한 미래가 안 되려면 우리는 지금이 중요하다.
여태까지 여권은 "이 정도가 무슨 위기냐"는 식의 주장이다. 두고 보면 알 텐데 왜 자꾸 위기라고 하느냐는 식이다. 내년에는 좋아진다는 꿀맛 같은 낙관론이 여권에서 나온다. 하지만 장 전 실장은 지난 여름엔 "연말이 되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게 지금이다. 그러더니 이번엔 "내년에는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로 슬그머니 바꿨잖은가.
그러다가 경제와 무관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5일 페이스북에 이를 인정했다. 조 수석은 “현 정부 출범 1년 반이 지났지만 경제 성장 동력 강화 및 소득 양극화 해결에 부족함이 많기에 비판을 받고 있다"며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나 가슴 아프게 받아 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는 2019년, 경제 성장 동력 강화 및 소득 양극화 해결을 위한 가시적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도 밝혔다.
수치에서도 그렇다. 지난 주말 공개된 문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를 경신했다. 리얼 미터 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8주 연속 하락하며 52.5%를 기록했다. 9월 평양 정상회담 직전 53.1%로 바닥을 쳤다가 경제 상황 악화 등으로 다시 하향 곡선을 그렸다.
앞서 한국갤럽이 조사한 지지율도 50% 초반까지 추락했다. 이는 9월 초의 최저치(49%)에 근접했다. 집권 중반기 진입을 앞두고 국정 운영의 활력 또한 대통령 지지율처럼 추세적으로 하락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뭐니 뭐니 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리얼미터 측도 “경제·민생 악화와 더불어 이재명 경기지사를 둘러싼 내부 분열이 중도 층의 이탈은 물론 여권과 진보 진영의 이완을 불렀다”고 분석했다.
최근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취업난으로 사회 진출에 실패한 20대 청년층의 불만이 지지율 하락을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드러났다. 박지원 민주 평화당 의원은 ‘이영자(20대와 영남지역, 자영업자)’가 등을 돌리면서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추락한다고 꼬집었다.
소득주도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김동연·장하성 경제사령탑을 교체했어도 시장반응은 시큰둥하다. 적폐청산과 평화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민생이 어려우면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2018년 16.4% 인상 등 지난 2년간 29% 인상, 2019년엔 10.9% 인상 예정인 최저임금의 인상도 그렇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영세상공인, 자영업자 등은 종업원을 내보내고 가족노동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로 인해 청년과 서민, 심지어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확연히 줄었고 그들의 소득도 감소했다.
-위기이니 대비하자는 솔직한 고백이 필요
지난해 월 평균 31만 6000명이었던 취업자 증가폭은 올해 1~9월 동안 평균 10만 400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가계소득이 한층 더 줄고 있다. 소득 격차가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해졌다. 지난 22일 통계청이 내놓은 ‘3분기 가계동향조사(소득부분) 결과’를 보면, 소득 하위 20%(1분위)의 3분기 월평균소득은 1년 전보다 7.0% 줄었다. 3개 분기 연속 뒷걸음질이다. 근로소득만 보면 1년 새 23%나 줄었다. 반면 상위 20%(5분위) 가계소득은 1년 전에 비해 8.8% 늘어났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차이를 보여주는 소득 5분위 배율은 5.52배로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친 2008년(5.45배)보다 높았다. 정부는 개선을 약속했지만 간극이 더 벌어졌다. 소득 상위 가계의 소득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소득의 양극화와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 양극화를 줄이고 분배를 개선하겠다던 정부의 노력은 헛수고다. 저소득층을 위한다는 정책을 썼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던 셈이 됐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최근 KDI의 발표를 보면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3.2% 늘었던 민간 소비가 올해 하반기엔 2.4% 증가에 그칠 것이라고 한다. 내년 상반기엔 2.2% 증가에 머무는 등 소비가 계속 위축될 것이라고 했다. 즉, 서민의 소득이 줄자 국민의 소비도 그다지 늘지 않는 것으로, 경제정책이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측은 내년엔 좋아진다지만 KDI 전망은 정반대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했다. KDI는 내년엔 경기둔화가 진행돼 잠재성장률은 2.6%. 저(低)성장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라의 경제가 보유한 자본과 노동력,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얻을 수 있는 성장치가 잠재성장률이다. 그러니 내년엔 모든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도 잠재성장률에 미달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인 것이다.
이런 관측이 여권의 낙관론보다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기업경기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자도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이렇게 기업 설비투자와 건설투자 등이 계속 ‘마이너스’ 상태인데 내년에 무슨 수로 경제가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인가.
서민경제와 밀접한 부채도 그렇다. 금융당국이 연내 금리 인상이 기정사실화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가계부채가 1500조 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이 21일 내놓은 ‘3분기 가계신용(잠정)’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카드·할부금융사 외상판매)을 더한 가계신용 잔액은 전분기 말에 비해 22조 원 증가한 1514조 4,000억 원을 기록했다. 1년 사이에 100조 원가량 불어났다.
가계부채 총액은 연간 GDP와 맞먹는다. 이는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는 수준이다. 정부가 가계 빚 구조조정을 위해 강력한 대출 억제책이 불가피해 보인다. 금리 인상의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채무 재조정이나 차등 금리 도입 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출 경색이 심해질 경우 신용도가 낮은 서민층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사설 대부업체로 몰려갈 수도 있다. 가계 빚을 줄이려면 가계 소득을 늘려 상환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자금이 부동산이나 주식이 아닌 생산 부문으로 흘러 내수 진작과 소득 증대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내년의 경제를 걱정하려면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 장밋빛 낙관론이 아니라 "지금이 위기이니 대비하라"고 해야 한다. "야당과 언론이 경제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고만 하지 말라. 정작 위기를 조장하는 측은 위기인데도 위기가 아니라며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집권세력이다.
현실에선 경제 정책의 낙제점, 정부 실패로 기울었다. 여러 경제지표에서, 다양한 경제주체들의 목소리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옳다. 지켜봐라.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말로 더 큰 위기를 부르지 않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