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공주 지역민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공주에 못 오게 막아야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공주에서 못 가게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두 고민은 연관성이 있는 사안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 전체를 관할하는 감영과 관찰사(순찰사)가 있던 곳이다. 여기에다, 백제의 왕도로 수천 년간 이어진 역사의 도시였다.
적어도 충남도청사가 대전으로 옮기기 전인 1931년까지는 충청도, 중부권의 교육, 문화, 행정, 상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1930년 후반 공주포구. 공산성 성벽위에서 찍은 것으로 금강대교아래 큰배들이 여러척 정박할 수있었다 1930년대 후반까지 공주가 금강연안의 저명한 하안포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물적증거다. 배들은 단순한 나룻배가 아니라 100석이상의 나락을 싣고 군산이나 강경을 오갔던 강배들이었다, 강배는 배밑이 V자인 바닷배와 달리 밑바닥이 평평해 흔히 평저선이라고 했다.[사진= 김영복박사가 소장한 공주포구사진켑처]](/news/photo/201811/8124_11214_921.jpg)
1920년대 말부터 공주지역에 루머가 나돌았다. 일제가 공주를 지나는 철로를 놓을 것이라는 소문과, 철도를 놓지 않으면 공주의 도청을 대전으로 옮긴다는 얘기였다.
당시 공주 사람들은 대전을 허허벌판에 없는 부락 정도로 생각했다. 실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대전은 공주부(公州府) 관내의 작은 마을로 표기됐을 정도다.
일제는 조선의 통치와 수탈하기 쉽게 하기 위해 경부선과 호남선 철길을 내야 했다. 충남과 충북을 합쳐 충청도 통합청사를 조치원 등에 놓으려는 조선 총독부의 계획도 이를 뒷받침한다.
![공주 금강대교[사진=충청남도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15_1320.jpg)
청주도 마찬가지다. 청주에 철도를 통과 시킨다는 설이 나돌았다. 그러자 충북의 유림들이 나서 이를 반대했다. 이 분위기가 공주로 이어졌다. 공주 유림들도 나섰다.
처음에는 유림의 반대가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총독이 슬슬 이 계획을 흘리니까 어느 순간부터 악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중에는 공주의 땅에 기(氣)를 뺐는다는 얘기가 풍수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영산(靈山) 계룡산에 터널을 뚫고, 공주 한 복판에 기관차가 달린다면 공주 양반고을의 맥을 끊는다는 설이다. 또 민가들도 나섰다.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면 암소가 사산을 하여 송아지를 못 낳는다는 루머가 삽시간에 퍼졌다.
주로 풍수지리 사상에서 철로가 놓이면 몇 대를 못 가서 후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느니, 선비가 나오지 못한다느니 별의별 유언비어가 나왔다. 심지어 당시 유림과 시민들은 지네(기차)가 닭(계룡산)을 뚫고 지나가면 큰일 난다고 노발대발 반대했다.
철도 신설 계획이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을 즈음, 이번에는 도청이 대전으로 옮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니 공주 지역민들에게 충남도청을 붙잡으려면 후손들의 재앙을 감수하고 철도를 받아들여야 하고, 철도를 반대하면 도청은 철도가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선택이었다.
![공주 공산성과 금강[사진=충청남도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16_1448.jpg)
이런 찰나 1910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일제는 대전을 경유하는 경부·호남선 철도를 놓겠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전의 일본인들과 개발계획을 암암리 전해 들은 지주들이 대전으로의 도청 이전을 적극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 대전에서는 지주들과 공주사람이면서 총독의 앞잡이자 친일행각의 장본인인 김갑순, 일본 거류민들이 충남도청 이전에 불을 붙였다. 결국 철도도 대전 쪽으로 나게 됐다고 한다.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공주시민들에 대한 보상물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공주에 농업학교를 세우는 것과 바로 금강대교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공주 지역민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주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다리가 놓이기 전, 공주를 가로 지르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서 꼭 지나가야 하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공북루’이다.
![공산성의 공북루[사진=네이버 블로그 켑처]](/news/photo/201811/8124_11217_1924.jpg)
공북루의 안내판에는 '공북루는 유형문화재 제37호로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 통로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1603년,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 터에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아래는 성(城)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 위를 마루로 만들어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였다. 건물 안에는 여러 글과 시 등이 걸려 있어 풍취를 더해 주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로 평가받고 있다'고 적혀 있다.
공북루는 백제의 대표적인 산성인 공산성(公山城)의 4방에 설치된 문루 중에서 북쪽 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루가 사라져,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만 설치된다.
공북루의 마루에 올라서면 공주를 흐르는 금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김영복 박사(식생활 문화 연구가)는 자신의 글에서 “개항 이전인 근대시기에는 ‘땅 길’보다 ‘물 길’이 훨씬 더 유용한 교통로였다”며 “당시 바닷길이나 강길 등은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고속도로였다”고 소개했다.
![곰(고마)나루 전설비[사진=충청남도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18_232.jpg)
그는 “요즘 사람들에게 땅길과 물길이 만나는 곳, 바다 산물(해산물)과 육지 산물이 교환되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심중 팔고 인천이나 부산 같은 항구라고 말할 거다. 개항시기에는 오늘 같은 항구도시가 없었다. 때문에 항구도시가 아닌 한강의 마포나 금강의 강경 같은 강가의 포구, 하안 포구(河岸浦口)였다”고 설명했다.
일대 금강은 예전에는 소금을 나르는 배가 왕래했을 정도로 수심이 깊었다고 한다. 물이 그만큼 잘 흘렀기 때문이다. 또 수질이 깨끗해 그 당시에는 금강 물을 그대로 마셨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까지는 물길 기능을 수행했고, 1970년대까지는 물을 그냥 마셔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복 박사는 이렇게 썼다.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곰(고마) 나루가 일본과 중국에도 알려진 국제항이었다 한다. 수중보가 없으면 샛강 수준인 요즈음의 금강 모습을 상기하면 실감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일본 사람들의 집계에 따르면 군산부터 부강(구들기 나루)에 이르는 금강 물길을 오르내리던 선박이 1년에 무려 1만 척 이상이 달했다. 1930년대 후반까지 공주 나루는 강경과 함께 금강권의 대표적 하안 포구였다.”
지금은 고마나루로 불리는데 '고마'는 '곰'의 옛말이다. 공주(웅진)의 지명 유래도 여기서 출발한다. 곰나루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충남 공주시에서 들려준 얘기는 이렇다.
![금강교에서 본 연미산[사진=충남도청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19_2956.jpg)
나루 건너편에 있는 연미산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곰나루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를 납치해 함께 살면서 새끼까지 낳았다. 어느 날 어부가 강을 건너 도망치자 버림받은 암곰은 슬픈 나머지 새끼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그후부터 강에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사람이 죽는 등 불상사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암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낱 전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1975년 곰나루 부근에서 돌로 만든 곰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대청댐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수위도 낮아지고, 물놀이조차 못할 정도로 오염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지금은 이런 상황이지만, 공북루는 공주 시가지 내륙에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만 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공북루를 지나 나루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야만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이 북적대는 요충이었을까.
사람이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고 꼭 이곳을 지나야 만 하니 돈에 눈 밝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3대 부자 중의 한 사람인 공주 부자 '김갑순'이 여기서 배를 빌려주는 사업(현재로 보자면 배 렌트업)을 했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떠 있는 배다리를 만들어 그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의 민자 유료도로인 셈이다.
그 후에는 여러 다리가 건설되어 나루는 점차 퇴화되어 없어졌지만, 서울과 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던 것은 여전했다. 우리나라에 기차가 들어오기 시작해 기찻길이 놓일 쯤에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공주에 철도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주 양반들이 반대하여, 공주에 오려던 철도가 대전 쪽으로 나게 되었다고 한다.
공주 사람들의 목마름을 채워주던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 소금을 잔뜩 실은 배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물길 역할을 하던 곳. 서울로 가기 위해선 꼭 지나가야 하는 관문 같은 역할을 하던 곳. 공주 부자 ‘김갑순’의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역할을 하던 곳. 그런 공북루 앞. 금강이다.
그때 김갑순의 얘기가 신문에 난 적이 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실린 ‘공주 공북루 밑 나루터에서 선부(船夫)들 농성’이란 보도다. “김갑순 가의 정조 4천 석을 논산(강경)으로 실어 나르던 선박 40여 척, 1주일간 계류. 김갑순에게 품삯을 받지 못한 선부 100여 명이 아사지경‘이란 기가 막힌 얘기가 있다.
공북루 밑 나루터, 나락을 실어내던 선부와 선박… 대체 무슨 얘기일까. 이는 김갑순 등 공주 읍내의 대지주들이 배를 이용, 소작료로 거둬들인 벼를 강경이나 전북 군산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빼돌린 (수탈한) 슬픈 얘기다.
![공주 출신인 친일파 김갑순[사진=충청헤럴드DB]](/news/photo/201811/8124_11220_3122.png)
충청인이 백제의 후예로써,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적 가치를 지금은 느낄 수 없기 때문인지. 내륙의 중심지로서 활기 넘쳤던 삶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며 건설된 금강대교(또는 공주대교. 금강계)는 도청이 1932년 10월 이전하기 전인 그해 1월 착공됐다. 그 후 3년 가까운 공사 끝에 1933년 11월에 완공되었다.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다리로 건설되었다. 공주 구 시가지인 충남 공주시 산성동과 신시가지인 신관동을 연결하는 다리다.
다리는 길이는 513.5m, 총폭은 6.5m, 유효 폭은 5.8m, 높이는 12m이다. 경간 수는 14개, 최대 경간장은 67m이다. 상행과 하행 각각 1차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6.25 전쟁 때 치열했던 금강 지구 전투 때 우리 손으로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게 위해 폭파했는데 반파되었다. 처음부터 튼튼했는지, 폭약을 덜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6.25 때 폭파된 금강대교[사진-공주영상문화관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21_3251.jpg)
아치 부분은 남고 아치 없는 부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6년 9월도에 반을 새로 놓았다. 금강대교는 국내에서 남아있는 다리 중 3번째로 오래된 철교다. 철도가 비록 대전으로 이전되어 건설되긴 했으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까지는 내륙교통이란 게 철도랑 지방도가 전부였다.
공주는 大(큰 대) 자로 뻗은 지방도와 충남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학적 특성으로 교통에서 큰 의미를 차지했다. 이후 1986년 공주대교가 새로 놓이기까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던 유일의 교량이었다. 이후 금강대교를 사이에 두고 공주대교에 이어 또 다른 다리인 백제대교가 건설되었다. 이어 2003년 정안천교 확장 공사도 이뤄졌다.
공주시는 전쟁의 상흔과 역사의 영욕을 간직한 금강대교를 대대적으로 보수한 적이 있다. 관광명소화 할 필요성 때문이다. 지난 2002년 3월 27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노후화로 인한 안전사고 방지와 공주 공산성과 연계한 관광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금강교 교량 상판과 난간 교체 등의 복원공사에 착공하여 2003년 3월 완공하였다.
![공산성과 금강대교[사진=충청남도 제공]](/news/photo/201811/8124_11224_365.jpg)
당시 충청남도와 공주시의 보도 자료를 보면 “쇠락하는 공주시의 모습이 금강대교의 복원공사로 심폐소생술로 공주가 살아난 듯하다”는 표현이 있다.
그만큼 금강대교는 지리적 중요성과 역사의 상징성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